"미 보복 어디까지…" 아랍권 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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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에 대한 동시 다발 테러범의 윤곽이 서서히 이슬람권 인물들로 드러남에 따라 아랍권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전쟁 수준' 에서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슬람 국가들은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긴장 속의 이슬람권=팔레스타인.이집트.레바논 등의 시민들은 처음엔 미국에 대한 테러를 '알라신의 응징' 으로 여기며 환호했다.

그러나 미국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10~24명으로 추정되는 자살테러범의 상당수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출신이란 보도가 전해지자 아랍권은 미국의 보복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당국은 전날 미국의 보스턴 헤럴드지가 지목한 자살테러범이 자국민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정보당국과 긴밀히 접촉을 벌였다.

팔레스타인은 테러 발생 사흘째인 13일 이스라엘군 탱크가 팔레스타인 관할지역인 예리코에 진입함에 따라 이번 사건으로 이스라엘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까 걱정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발언도 쏟아졌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을 미국이 해결했더라면 이번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이라며 미국에 화살을 돌렸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민들은 미국 지도자가 뿌린 가시를 거둬들였다" 고 독설을 퍼부었으며 이란의 IRNA 통신은 테러에 반대한다면서도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국제적인 긴장이 고조됐다" 고 지적했다.

◇ 대책 마련 분주=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격인 파키스탄은 미국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번 테러의 배후로 지목돼 인도를 요청할 경우 파키스탄에도 엄청난 압력이 작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페레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12일 밤 철야로 각료들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그는 13일 파키스탄 주재 웬디 체임벌린 미국 대사와 면담했다.

파키스탄의 한 관리는 "수도 카불에서 파키스탄 외교부 관리가 탈레반측과 만나 미국이 제시한 모종의 메시지를 보냈다" 고 말했다. 이후 파키스탄은 미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별도의 성명을 냈다.

파키스탄의 최고 정보 책임자가 13일 워싱턴에서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과 비밀회동을 갖고 미국의 공습시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문제를 협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테러 발생 다음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전화통화를 하고 "테러리즘에 맞선 국제회의를 발의할 필요가 있다" 고 강조했다.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19일 시리아를 방문한다. 그는 93년 오슬로협정 이후 관계단절 직전까지 갔던 양측은 이번 만남에서 전략적인 협력 관계를 회복할 예정이다.

◇ 전망=미국은 테러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등에 엎고 소수의 이슬람원리주의 세력과 다수의 온건 아랍권을 분리하는 전략을 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이 아랍권의 분열을 유도할지 오히려 '이슬람 형제국들' 의 단결을 강화시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이 특정 이슬람 국가를 향해 파괴적인 공격을 감행할 경우 아랍권의 여론은 돌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향후의 대결 구도가 '테러 대 반테러' 가 아니라 '기독교문명권 대 이슬람문명권' 의 충돌로 번질 경우 사태는 세계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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