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근무 때 북한 군인들 귀순 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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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북한은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비참하더군요. 남한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걸 생각하면 북한 정권은 한마디로 끔찍합니다.”

5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한스 지버(79·사진)는 “평양의 분위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했다”고 말했다. 중립국인 스위스 인인 그는 1956년 1월부터 10개월간 중립국감시위원회(NNSC) 장교로 판문점 남한 관할지역에서 근무했다. 지버는 이달 6~10일 북한 방문을 마치고 서울을 방문했으며 17일 판문점 남한 관할지역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스위스 연방의원 5명이 포함된 방북단은 평양·개성·묘향산·판문점 등을 둘러봤다.

지버는 “김일성·김정일 동상 등 선전물들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으리으리한 반면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게 없어 고생하는 걸 보면 이해가 안 된다”며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북한 지도층을 보면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도 남북이 통일되기 어려울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한이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고속 성장을 한 걸 보면서 판문점에서 보낸 시간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1956년 11월 평양의 한 호텔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한스 지버. 그는 당시 비무장지대를 관할하는 중립국감시위원회 소속 스위스 장교였다.

그는 판문점에서 근무하는 동안 2~3차례 탈북 북한군인을 만났다고 했다. “판문점 근무 당시 막사에서 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 열어보니 자동 소총을 지닌 북한 병사가 ‘남한에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 병사를 막사 인근의 미군 헌병 초소로 데려가 귀순 절차를 밟도록 도와줬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는 56년 여름 북한군의 미군 항공기 격추 사건을 꼽았다. 지버는 “나중에 북한군은 판문점을 통해 항공기 잔해와 조종사 시신을 반환했다”며 “끔찍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NNSC는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나라인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에서 45명씩 파견한 군인들로 이뤄졌다. 53년 정전협정으로 만들어진 이 위원회는 남북한 군사동향을 살피고 비무장지대(DMZ)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 왔다. 북한 측 DMZ를 관할하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철수한 뒤 현재는 스위스·스웨덴 장병 10명만 남아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씨가 연기한 소피 장도 NNSC에서 파견한 스위스 국적의 수사관으로 설정됐다. 지버는 55년 스위스의 NNSC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해 선발됐다. 군 제대 뒤에는 스위스 제2소매은행인 쿱방크에서 일하다 정년 퇴직했다. 79년과 96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는데, 79년 방문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직후여서 제대로 여행도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그는 “판문점 근무 뒤 한국 소식이라면 무엇이든 관심 있게 보고있다”며 “스위스 언론들이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 자세히 보도해 잘 알고 있는데, 한국의 지도층과 국민이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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