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칫거리를 ‘껴안고 사는’ 회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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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가 있다. TV·인터넷 쇼핑업체인 CJ오쇼핑의 고객 자문단이다. 반품 횟수가 200회를 넘거나, 전화 상담원을 울린 적이 있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대하기 힘든 고객을 피하기보다 과감히 부둥켜안자는 발상에서 나왔다.

골칫거리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역발상’ 사업 전략이 많다. CJ오쇼핑의 진원상 부장은 “고객은 의외의 곳에서 만족을 얻고, 회사는 섬세하다는 이미지를 내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성욱(52)씨는 “교과서에 나오는 마케팅은 이제 누구나 다 안다. 우리 같은 중소업체들은 돈 덜 드는 창의적 아이디어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골칫거리를 마케팅하다

안드레아바냐는 예식용으로 맞춘 턱시도를 무료 수선해 준다.

값비싼 결혼 예복은 결혼식이 끝나면 홀대받는 ‘장롱 신세’가 된다. 그래서 많이들 빌려 입는다. 맞춤정장 브랜드 안드레아바냐는 턱시도를 장만한 사람에게 무료 수선을 해준다. 결혼 시즌인 4월 한 달 동안 턱시도를 맞춘 새신랑이 대상이다. 예식 때 입은 턱시도를 일반 정장으로 고쳐준다. 정길남 대표는 “턱시도 판촉에 도움이 되고, 의류의 재활용이란 점에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돼지고기 생산·유통업체인 선진의 ‘선진포크’는 다이어트족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 체지방 감소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공액리놀레산’(CLA) 성분이 일반 돼지고기보다 20배 이상 많다고 한다. 선진은 날씬한 몸매를 선망하는 20대 여성들이 삼겹살을 꺼린다는 점을 뒤엎어보려고 했다. 이범권 사장은 “‘먹어도 살찌지 않는 삼겹살’을 내걸어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크린토피아가 경기도 동탄에 대형 창고를 마련해 겨울옷을 보관해 준다.

세탁 프랜차이즈 크린토피아가 ‘초대형 옷장’을 장만한 것도 ‘골칫거리를 마케팅한’ 사례다. 전국 1300여 곳의 점포에서 겨울철 코트나 두꺼운 이불을 고객한테서 받아 세탁한 후 반 년 이상 보관해 준다. 이 ‘장기 의류보관 서비스’는 기존의 사업과 시너지를 내는 ‘관련 다각화’의 생생한 사례다. 까다로운 고객을 염두에 두고 ‘창고’가 아니라 ‘옷장’처럼 깔끔하게 꾸몄다. 실내온도 25도, 습도 40~60%로, 옷의 변형을 막아주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햇볕 차단장치를 달아 변색 염려를 줄였다.

일반 토마토보다 20% 싼 신세계 이마트의 ‘주스용 토마토’.

인터넷쇼핑몰 ‘원어데이’(www.oneaday.co.kr)는 하루에 한 가지 품목만 판다. 대신 값이 최대 50%까지 싸다. 사이트에 들어가면 너무 많은 상품이 진열돼 비교하고 고르는 데 진을 빼는 누리꾼의 고민을 덜어준다. ‘인터넷 쇼핑의 매력은 물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쇼핑몰이 직접 물건을 골라주기로 한 것이다. 쇼핑몰 직원 25명이 몸소 써본 뒤 합격점을 준 제품만 판다. 2008년과 지난해 각각 70억,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외형이 쑥쑥 크고 있다.

신세계이마트가 2006년 선보인 ‘주스용 토마토’는 농민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줬다. 유통업체들이 굵직한 토마토(160~240g)나 방울토마토만 사는 바람에 거의 버리다시피 했던 어정쩡한 중간 크기의 토마토를 주스용 토마토란 이름을 달아 판 것이다. 일반 토마토보다 20%쯤 저렴하다는 걸 내세워 이마트 전체 토마토 매출의 60%를 차지하게 됐다.

#역발상으로 고객 불만 잠재우다

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 본점 과일 매장의 ‘오늘의 당도 알림판’.

비 오는 날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과일매장은 표정이 어둡다. 과일의 당도가 떨어져 반품하거나 교환하는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올봄 같은 변덕스러운 날씨에는 과일 맛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현대백화점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오늘의 당도 알림판’ 서비스다. 날씨가 궂은 날 과일 코너에 아예 ‘비가 내리면 당도가 떨어집니다’라고 써 붙이고 과일별 기준 당도와 당일의 당도를 표시한 것이다. 김효길 현대백화점 과일 담당 바이어는 “미리 맛이 떨어진다는 걸 고지했더니 반품·환불 건수가 확 줄었다”고 전했다.

이승창(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 한국유통학회장은 “소비자 취향이 까다로워지고 불편을 쉽사리 드러내는 경향이 늘면서 골칫거리에 과감히 맞서는 마케팅 전략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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