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빌려줄 수 없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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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10면

나는 서재도 갖고 있지 않고 또 서재가 필요할 정도로 많은 책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집에 오는 손님들은 그렇게도 할 말이 없는지 이렇게 묻는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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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 읽지 않았다. 고작 반이나 읽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읽은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이라면 왜 이곳에 두었겠어요?” 혹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여기 있는 책들은 이 달 안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죠. 다른 책들은 창고에 두었어요.”

농담은 주고 받는 사람 모두 그것이 농담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질문한 사람의 놀란 턱이 빠지기 때문이다. “책을 정말 많이 읽는군요.”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에코의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책을 빼어 보여준다. 내가 한 대답은 모두 그 책 속에 들어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책을 빌려달라고 한다. 나는 책을 빌려줄 수 없다. 그 이유까지 에코의 책 속에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책을 살 때 제본상태까지 확인하는 사람이다. 마치 옷의 바느질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는 여자처럼 어디 한 곳이라도 허술하면 들었던 책을 내려놓는다. 당연히 읽을 때도 신경을 쓴다. 그러니 책을 빌려줄 수 없다. 책을 빌려간 사람의 독서습관까지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 몇 번인가 책을 빌려주었다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책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책을 읽다가 책장을 접는 것은 나은 편이고 아예 책날개를 뜯어놓거나 책등을 반으로 갈라놓은 참혹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돌려주기만 한다면 고맙다. 아예 안 돌려주는 사람도 있다.

재수할 때였다. 친구가 다니던 문학회에 따라가서 몇 번 본 선머슴 같은 여학생은 영문과를 다녔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얼마 전에 읽었던 한수산의 『부초』 이야기를 하자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책을 빌려주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 여학생은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는 아이로 악명 높았다. 선배와 동기로부터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책을 몇 권씩, 많게는 전질로 빌려서는 절대 돌려주지 않고 버틴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아이의 집에 있는 모든 책들이 그렇게 빌려서는 돌려주지 않은 책들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나는 ‘하늘이 노랗다’는 말이 얼마나 사실적인 표현인가 알게 되었다.

나는 스토커처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책을 돌려줄 것을 사정했다. 때로는 양심에 호소했고 때로는 이성에 협박했다. 심지어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책 반환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라도 할까 했으나 당시 대학 정문 앞에 상주하던 전경들이 무서워서 그만두었다. 소문처럼 그 여자아이는 강했다. 끈질겼다. 생글생글 웃으며 절대 책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생글거리는 웃음 공포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나도 끈질겼다. 결국 나는 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런데 늘 바지차림에 선머슴 같았던 그 여자아이가 물방울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약속장소로 들어서는 것 아닌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책은 제대로 돌려받았는지 모를 정도로 땀만 흘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누구에게도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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