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질주] '지옥의 묵시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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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강. 아주 길고 탁한 강. 강물은 넋이 나간 짐승의 눈동자처럼 눈이 풀려 있고, 물은 속을 감춘 채 탁류의 거센 물결을 말 없이 흘려 놓는다. 그 강은 바다로 나아가지 않는다. 강의 끝은 늪이며, '지옥의 묵시록' 은 바로 이 베트남의 넝강에서 시작하는 지옥으로의 여행기다.

프랜시스 코폴라가 베트남 전쟁을 지옥이라고 보는 까닭은 간단했다. 베트남전은 명분이 없는 전쟁이었고, 이는 더 어리석고 과도한 도덕적 위기를 병사들의 가슴 속에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렵기에 광기에 몰입하고, 물자와 장비의 지원이 풍족할수록 영혼을 잃는다.

잘 알려진대로 '지옥의 묵시록' 은 영미 문학의 거봉인 제임스 콘라드의 『암흑의 심장』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19세기부터 제시된 콘라드의 예견은 20세기로 평행 이전, 베트남의 넝강에서 공명한다.

베트남전은 15세기 이래 계속돼온 서구 제국주의 역사가 자기파탄을 맞는 거대한 무덤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핵심엔 어둠의 화신 커츠 대령이 존재하고 있다. 말론 브란도가 연기하는 커츠 대령은 도저히 압도할 수 없는 절대 악, 절대 타자의 상징이고 그 세계로 뛰어든다는 것은 바로 죽음과 직면하는 전쟁의 통과제의 같은 것이기도 하리라.

코폴라는 콘라드가 제시한 매혹과 공포의 타자, 죽음의 사신이자 이성의 블랙홀 같은 어둠(darkness)을 고막을 두드리는 듯한 폭력적인 사운드로 이미지화한다. 관객의 귀를 전쟁터 한가운데로 몰아넣으며, 점차 빛은 어둠 쪽으로 무게 추를 옮긴다.

초반의 요란한 공중샷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윌러드와 커츠의 긴장된 공기를 잡아가는 클로즈업 위주의 화면으로 대치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폴라의 카메라는 전쟁의 포연 속에서 심리적 거리감을 잃어가는 병사들의 흔들리는 혼을 말 없이 증언해 낸 것이다.

말할 것도 없는 명장면, 전쟁광 킬고어 중령이 베트남의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 는 베트남 인민들에게는 죽음의 서곡이며 미군들에게는 자신의 헬리콥터가 하늘을 나는 비마가 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코폴라는 바그너의 장중한 오페라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광기 건너편에 있는 욕망은 바로 '신이 되는 것' 임을, 베트남전은 베트콩이라는 적 자체를 지워가며 얼굴 없는 신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미국의 헛된 욕망의 그림자였음을 웅변으로 주장하고 있다.

'지옥의 묵시록' 이 개봉된 후 22년. 49분이나 길어진 리덕스 판을 보니, 마틴 쉰.말론 브란도.데니스 호퍼 같은 억대 배우들을 1년씩이나 정글에 가두어 두고, 어떤 특수효과도 눈속임도 없는 이런 영화를 다시는 만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워진 지옥을 본다는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형언할 수 없는 쾌감. 그것은 감독 자신과 많은 사람들을 공포와 집착, 강박의 춤을 추게 했던 너울거리는 광기의 체험이리라.

'지옥의 묵시록' 은 인간이 전쟁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가장 감각적인 형태로 재현해낸 거대한 전쟁 쇼이자, 어둠의 심장을 넘어 걸작의 반열로 항해 중인 현대판 '신곡' 이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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