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미술 접목에 건축·패션이 하나로 '크로스 오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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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군 훈련, 거울에 비친 혓바닥 등 생활 속에서 발견한 소재를 미술과 접붙여 다시 벽지·의자 등 생활의 미

알록알록 꽃무늬 벽지가 그림 같다. 바닥에 놓인 동그란 의자를 감싼 천은 독특해 눈길을 끈다. 가까이 다가간 이들이 깜짝 놀란다. 멀리서 아름답던 문양을 뜯어보니 분홍 꽃봉오리는 혓바닥 사진이요, 색색 오뚝이 무늬를 받치고 있는 건 예비군복 아저씨들이다. 눈에 익은 상투적 표현에 물음표를 붙이고 상식을 뒤집은 미감이 신선하다. 섬유미술을 전공한 이중근(33)씨는 전시장에 유희적 수수께끼를 던져놓았고 관람객은 걸려들었다.

11일 서울 서초동 갤러리 세오(대표 서자현)에서 막을 올린 '크로스오버 2004'는 생활 속에서 미술을 찾은 뒤 미술로 생활의 질을 높이는, 말하자면 일상과 예술의 가로지르기 전시다. 이중근씨와 함께 작품을 내놓은 이주은(35).김성수(31).이명진(29)씨는 삶과 미술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양쪽을 다 살찌우는 젊은 작가들이다. 건축.디자인.사진.회화.비디오.패션이 하나로 접붙어 우리 몸 가까이서 숨쉰다.

이주은씨의 작품 제목은 '이야기를 걸다'다. 흰 천을 누르고 있는 의자의 다리 부분이나 폭신한 타월을 확대해 찍은 사진에 '레진'이라는 표면 처리를 해 사물은 부드럽고 꿈꾸는 듯 보인다. 집안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물건에 이야기를 건 작가는 그들을 깨워 이상한 풍경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유리공예를 전공한 김성수씨는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물의 감각을 불러왔다. 부엌 설거지통에서 튕기는 물, 목욕탕 욕조에서 졸졸 빠지는 물이 유리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1500도가 넘는 용해로에서 녹인 유리를 파이프에 말아 입으로 불어 만드는 '브로잉 기법'은 사람의 숨이 들어가 자연에 더 가깝다. 그가 '브로잉 기법'으로 만든 유리 물방울이 놓인 전시장은 물의 세계로 넘실거린다.

이명진씨는 벽면에 문짝을 붙여놓고 '문을 열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러 가지 색깔, 서로 다른 번호를 쓴 문은 손잡이를 돌리면 벽 너머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집 속에서 다른 집 속으로 걸어가는 상상은 습관에 젖은 우리 삶에 싱싱한 탄력을 던져준다.

이들의 작품은 미술관이나 화랑 속에 죽어 있는 미술이 아니다. 관람객 누구나 생활 속으로 데려와 함께 즐기며 느낄 수 있는 꿈의 마술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진(홍익대 겸임교수)씨는 "21세기는 예술과 생활이 상호 침투돼 삶의 질을 높이는 '크로스오버'의 양식이 당분간 시대를 끌어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2월 10일까지. 02-522-5618.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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