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고3교실] 上. "교실서 선생님 뵌지 오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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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시모집 전면 확대로 '연중 입시 체제 원년(元年)' 이 된 올해 일선 고3 교실은 1학기 초부터 '대입 전쟁' 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면학 분위기는 헝클어져 대학 입시 직후의 '파장(罷場)' 처럼 어수선하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선생님 뵌 지가 오래" 라며 불만이고 교사들은 "또 내년엔 어떻게 될지…" 라며 한숨만 내쉰다.

◇ 파행 수업, 방황하는 학생들〓서울 강남 J고 李모 교사(사회과)는 지난달 30일 고3 두 학급 학생들을 모아 '합반수업' 을 했다. 고3 담임들이 수시 원서 작성에 매달리는 바람에 정상 수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 한 명이 학생 1백여명을 가르치다 보니 수업은 통제불능 상태가 돼버렸다. 앞줄 10여명은 다른 과목 책을 꺼내들었고 상당수 학생들은 엎드려 잠을 자거나 잡담을 나누었다. 교사가 자리를 비운 다른 고3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유행가를 '합창'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李교사는 "수시모집 지원자는 물론 정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도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라 마음을 못잡고 있다" "아예 수업에 안들어오는 학생이 한 학급에 대여섯명이나 되지만 학교 책임도 있어 아이들 탓으로만 돌리기도 힘들다" 고 말했다.

수도권 C고등학교 3학년 吳모(18)군은 "선생님들이 수업은 소홀히하고 수시모집에 지원한 몇몇 학생들에게만 신경쓴다" 며 울분을 터뜨렸다.

수시모집에 뛰어든 학생들 역시 원서를 작성하느라 수업은 뒷전으로 미뤘다. 경기도 A여고 崔모(17)양은 지난 5월 중앙대 수시 지원을 시작으로 지난달 말까지 무려 10개 대학에 원서를 냈다.

崔양은 "지원학교와 학과에 따라 자기 소개서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원서를 작성하는데 1주일 정도 걸린다. 최근에는 아예 교무실에서 살았다" 며 "정작 수능 준비는 제대로 못해 걱정" 이라고 말했다.

◇ 손놓은 공교육=서울 강북 O고 具모(44)교사는 2학기에 들어 수시모집 원서 작성에 발목이 잡혀 학생들에게 자습만 시킨다.

예년이면 기출문제 풀이나 모의고사를 치르며 막판 정리가 한창일 시간이어서 具교사의 마음은 편치 않다.

최근 수도권 한 고교에서는 교사들이 "이럴 바엔 수업시간을 줄여달라" 고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수도권 D고 鄭모(29)교사는 "반에서 2~3등 하던 학생이 1.2학기 수시모집에 정신을 쏟느라 석차가 20등 정도로 떨어졌다" 며 " 수시모집에서 낙방하면 정시는 포기해야 할 정도" 라고 말했다.

서울 H고 成모(고3 담임)교사도 "연중 입시 체제로 학교가 제 역할을 못해 학생들이 자연히 사교육에 더 의존하려 한다" 고 털어놓았다.

◇ '수업 불능' 교사의 고민=지난달 31일 경기도 S고 金모(30.국어 담당)교사는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오전 5시30분 학교로 달려갔다. 1학기 수시모집에 지원한 학생 네 명 중 한 명도 합격시키지 못한 담임 金교사는 요즘 더욱 초조하다.

매일 출근해 대학마다 천차만별인 지원요강을 따져보고 계획을 짜느라 여름방학을 반납하다시피 했다. 金교사가 이 날 하루에 처리해야 할 원서만 20장.

자기소개서.교사추천서.학업계획서.생활기록부.수상경력증빙서류.인적사항기록용 OMR카드.성적증빙서류…. 수시 지원을 위해 학생 한 명이 챙겨야 할 서류가 많게는 10여개에 달한다.

성적 산출 방법도 대학에 따라 평어(수우미양가), 과목별 수업 단위수에 맞춰 가중치를 준 평어 및 과목별 평균석차 백분율 등으로 다양하다.

또 '학업성취도를 기록해달라' '학력 부분은 제외하고 인성에 대해 써달라' 는 식으로 추천서 양식 요구마저 제각각이다. 따라서 원서 하나를 작성하는 데 적어도 2~3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학생들은 조급한 마음에 보통 서너군데 대학의 지원서를 들고 찾아오곤 한다. 金교사는 "개학 이후 수업을 못한 날이 열흘 이상 된다" 며 "오늘도 3학년 수업이 5시간이 있었지만 한 시간도 들어가지 못했다" 고 답답해 했다.

金교사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예고없이 몰려오는 '충동 지원' .이날도 자신이 맡은 학급의 한 학생이 부모와 함께 교무실로 달려왔다.

"우리 아이도 그냥 있을 순 없다. 제발 한번만 써달라" 는 학부모의 애원에 원서 하나를 '급조' 했다. 새벽 1시 교무실을 나서는 金교사의 가방엔 손도 못댄 지원서 세 장이 들어 있다.

그는 "수시에 응시하는 일부를 위해 관심 밖으로 몰린 나머지 학생 40여명을 생각하면 내가 과연 교육자인지 자탄하게 된다" 며 "누구를 위한 수시모집인지 한번쯤 돌아봐야 할 때" 라고 지적했다.

조민근.홍주연.강병철.남궁욱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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