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20세기 예술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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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박용구 옹의 대담집은 의표를 찌른다. 올해 88세 미수(米壽)인 원로의 경륜과 시야가 담긴 책은 그 자체가 '어른 없는 우리 사회' 에 오랜만에 듣는 귀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목소리에는 '88세 청년' 의 모습과 힘이 실려있다. 음악.연극에서 건축.문학에 이르는 관심의 폭은 딜레탕트로 머물지 않고 르네상스인다운 전방위 시야로 열려있음이 책에서 확인된다.

해방 전후 당대의 재사(才士)였던 정지용.임화 등 문인에서 김순남.채동선 등 음악가들과의 교유와 이에 대한 회고도 그의 대담집을 귀중한 증언으로 만든다.

이를테면 문학사적 기억의 저편에 있는 작가 임화(1908년생)가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 들려줄 만한 목소리가 이 책의 앞부분을 장식한다. 이 책의 가치는 한걸음 더 나간다.

한반도와 관련된 문화론과 지정학적 미래예측도 다소간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경청할 만하다. 특히 연줄망과 편파성에 찌든 한국사회에 대한 꾸짖음도 속이 후련하다. 이를 대화록 형태로 펴낸 것도 상찬할 만한 기획이지만, 아쉬운 점은 적지않다.

대담자 장광열(무용평론가)이 보다 경륜이 높았을 경우 이 책은 보다 충실한 쌍방향 대화가 선보일 수도 있었을게다. 『토인비와의 대화』같은 책 말이다.

또 책의 만듦새가 다소 엉성하고 오자(誤字)도 심심치 않다. 어쨌거나 박옹 만이 던질 수 있는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이를테면 그는 해방 직후 상당수의 월북 재사(才士)들은 이념에 고갈 당했고, 남쪽의 인사들은 '비만증에 뒤뚱거렸다' 고 지적한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고갈 당해버리고, 여기 남은 사람들은 모두 성주(城主)나 된 듯 비만증세로 뒤뚱거렸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체제순응돼 버리면서…. 앞으로는 새 사람들에게나 희망을 걸어야 할는지…. " (53, 115쪽)

책의 앞대목에 실린 문화일반에 대한 증언과 훈수도 흥미롭지만, 뒷대목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는 한국사회는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꾀를 부리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국가' 라고 규정한다.

그런 기질은 이동성이 강한 유목민에서 농경사회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때론 폐쇄성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구한말의 어리석음이 그것이고, 화교(華僑)를 발을 못붙이게 했던 근시안적 기질이 그것이다. 학연.지연으로 뭉치는 배타성과 냄비기질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반도는 돌연변이형 천재(뮤탄트)들이 출현하는 역동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어제 오늘의 뮤탄트로 박옹은 비디오예술가 백남준, 일본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재일동포 사업가 손정의, 세종대왕 등 3명을 꼽는다. 그러면서 해외 5백만 동포야말로 기대를 걸어봄직한 미래의 자원이라고 평가한다.

또 박옹은 장르간 융합을 전제로한 미래의 예술운동으로 '심포닉 아트' 의 등장을 예견하며, 이를 통합할 인물인 '프로젝드 디자이너' 들이 다수 출현할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한 토양으로 한반도는 썩 괜찮다는 것이다.

박옹은 해방직후 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펴낸 국내 첫 음악평론가. 평양고보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만나 퇴학처분 뒤 일본에 유학했다. 4.19직후 JP와 함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를 공연했고, 문화예술 전분야에 평론활동을 했다.

청년시절 당시 가진 좌파 성향 때문인지 좌우를 포괄하는 탄력적인 자유주의자로 활동해온 그는 88올림픽 당시 개.폐막식 행사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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