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실업 시대' 들어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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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이 본격적인 '고실업 시대' 에 들어섰다. 5%대의 실업률은 선진국 가운데 독일(9.3%).캐나다(7.0%)보다는 낮지만 미국(4.5%).영국(3.2%)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종신고용으로 상징되던 일본의 전통적인 고용구조가 장기불황과 시장개방 여파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내각은 본격적인 구조개혁에 착수하기도 전에 정치권으로부터 고용대책을 마련하라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게 됐다.

◇ 변화하는 고용구조=일본 경제의 주축이던 제조업 부문의 실업이 두드러지고 있다. 7월 한달간 제조업의 취업자수가 58만명이나 줄어들었다. 최고였던 1992년과 비교하면 9년간 무려 2백50만명이나 감소했다. 이는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나타난 이른바 '산업공동화(空洞化)'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인 간병.택배 등 새로운 서비스업에서 취업자가 늘고는 있으나 제조업에서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들을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 앞으로가 더 문제=올 상반기 중 도산기업의 종업원수는 8만4천명으로 1년 전보다 15%나 늘어났다. 이들의 대부분은 조만간 실업자로 전락할 처지다. 또 정보기술(IT)경기위축으로 도시바.히타치.NEC.후지쓰.미쓰비시전기 등 전자업체들의 감원계획만 해도 4만8천명에 달한다.

일본의 국제 공약사업인 '2년 내 부실채권 정리' 도 실업률 상승과 직결된다. 금융청의 지도에 따라 은행들은 건설.유통.부동산업체 등 은행빚이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대출을 회수하거나 추가지원을 중단키로 했다.

여기서도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실업률이 높아지면 개인들의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어 경기회복에는 큰 부담이 된다. 따라서 기업경영이 나빠지고 이것이 다시 감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 개혁의 자극제 될 수도=일본 정부는 고용안정을 위한 추경예산을 편성할 방침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미 재정긴축을 약속해놓은 터라 마구 돈을 풀 수는 없다.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이나 일정기간의 실업수당 등 제한된 분야에서 사용될 전망이다. 대신 대학벤처 지원, 신산업 육성 등 장기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일본 내 지식인층에서는 실업률 악화가 '위기불감증' 에 걸린 정계를 자극해 개혁을 서두르게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실업률이 8%쯤 돼야 위기를 느끼고 진지하게 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도 "구조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통" 이라며 개혁 우선의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장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경기부양책을 요구하고 있어 타협안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업률 악화가 개혁의 방아쇠가 될지, 개혁의 족쇄가 될지는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적 결단에 달려 있는 셈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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