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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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제2장 신라명신

지난 가을.

내가 미데라를 찾았을 때는 마침 단풍이 무르익어 만산이 홍엽으로 물들던 만추였다. 미데라는 오미지방에 있는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 되고 유서 깊은 절로 특히 일본의 3대 명종(名鐘)의 하나인 만종(晩鐘)을 갖고 있다.

1601년에 주조된 만종은 비록 오래된 종은 아니지만 그 자태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종소리로 인해서 오미의 팔경(八景)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미데라는 대우 왕자가 죽자 조카의 넋을 기리려는 천무에 의해서 686년 건립되었고, 그 이후부터 오토모들의 씨사가 되었지만 지금의 대 가람으로 성장한 것은 그로부터 1백50여년 후 천태종(天台宗)의 제5조인 엔친(圓珍)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 미데라의 초대 주지인 장리(長吏)로 진좌(鎭座)한 후부터였던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미데라는 신라 토착 세력들이었던 오토모들의 씨사에서 전일본의 불교적 정신의 중심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초대주지였던 엔친이 죽자 왕은 그에게 지증대사(智大師)란 시호를 내렸는데 일본에서 왕이 승려에게 대사란 시호를 내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미데라는 특히 엔친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갖고 온 수많은 경전과 불경으로 전법도장(傳法道場)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절이었던 것이다.

나는 샅샅이 미데라를 살펴 보았다.

미데라는 장등산 산록에 위치한 대가람으로 그 한가운데 금당(金堂)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금당 안에는 이 절이 보관하고 있는 각종 국보급 유물들이 안치되어 있다.

이 절의 실질적인 창건주인 지증대사, 즉 엔친의 좌상(坐像)을 비롯하여 11면 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 천수관음입상(千手觀音立像), 부동명왕입상(不動明王立像), 석가여래좌상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들이 금당 안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가람의 뒤편에는 아직도 엔친이 당나라에서 가져왔던 경전들을 보관하고 있는 '일체경장(一切經藏)' 의 건물을 비롯하여 그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널리 알려진 삼중탑(三重塔)과 엔친의 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 많은 건물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대부분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으므로 실제로 내가 관람할 수 있는 건물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지만 나는 하찮은 단서에서도 결정적인 물증을 잡으려는 수사관처럼 모든 건물과 유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신라사부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신라사부로가 입고 다니던 전설적인 붉은 갑옷은커녕 신라사부로의 출생이 오토모씨들이 살고 있던 이곳, 그중에서도 오토모씨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미데라와 무슨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조차 보기 좋게 빗나가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날 오후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미데라를 나섰다. 그러나 이대로는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에서 산 미데라의 연혁을 기록해놓은 책 속에서 나는 절에서 떨어진 곳에 홍문천왕(弘文天王)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는 내용을 읽은 것을 떠올렸던 것이었다.

홍문천왕이라면 대우 왕자의 시호.

대우 왕자가 홍문천왕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비극적으로 죽은 지 1천3백년이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천무는 자신이 죽인 조카, 일본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왕자, 대우의 무덤 앞에 절을 세울 것을 진상하였으면서도 그의 죽음만은 철저히 침묵 속에 부쳤던 것이었다.

아니다. 비극의 왕자 대우를 비밀의 무덤 속에 가둔 것은 천무뿐이 아니다. 일본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대우의 죽음을 침묵의 비밀 속에 봉인(封印)하고 있는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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