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여학생, 55년전의 저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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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일러복 차림으로 칠판에 러시아어를 쓰고 있는 여학생이 바로 나예요. "

지난 14일 본지의 '사진으로 본 8.15 이후의 북한'에 실린 55년 전 한 빛바랜 사진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서울 중구 중림동에 사는 김옥숙(金玉淑.69)씨. 지금은 칠순의 할머니가 됐지만 당시 꿈 많던 소녀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46년 봄이었어요. 평양 정의여고 2학년일 때였지요. 하루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잠시 촬영이 있을 거라고 해요. 앞줄에 있던 나를 불러 단어를 써보라고 하셨지요. "

다른 몇몇 학생도 선생님의 질문을 받거나 책 읽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이때 촬영된 장면은 북한을 소개하는 선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당시 극장 뉴스시간에 상영되기도 했다는 것. 그 해는 각종 시위와 선거가 이어진 한해였다.

3.1절, 5.1절(노동절), 11월 인민위원회 선거 등 행사 때마다 여학생들도 동원됐다고 金씨는 전했다.

" '김구.이승만 괴뢰 타도하자' '미군 타도하자' 등 구호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인민위원회 선거 때는 흥겨운 분위기를 만든다며 학생들이 선거장에 동원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지요. "

金씨는 또 2월에 있은 토지개혁이 친구들의 신상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했다.

"당시 정의여고는 평안남북도의 지주 딸들이 많이 유학을 와 있던 명문교였어요.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 집안 친구들은 하루 아침에 생활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속출했지요. "

당시 金씨네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압박을 받았다.

"주일에 교회에 가느라 학교에 빠지면 선생님께 불려가 일장 훈시를 들어야 했어요. 보안서원(경찰)들이 주일이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검열도 했지요. 우리 집도 두번이나 걸려 벌금을 물고 보안서에 불려가 주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

金씨는 이런 '성분' 때문에 그해 문을 연 평양음대나 김일성종합대로의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부모님들은 곧 통일이 될테니 그때 가서 공부를 더 하라고 위로했었지요. "

金씨는 6.25가 난 50년 12월 초 온가족(부모.9남매)과 함께 평양을 떠나 월남했다.

"부산에 머물면서도 부모님은 '며칠만 피했다 돌아가면 된다' 고 하셨어요. 분단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꿈에도 몰랐고…. 그렇게 세월이 흐른 겁니다. "

50년대 후반 서울에서 결혼해 2남2녀를 둔 金씨는 지금도 간혹 빛바랜 그 사진처럼 아련한 옛일들을 떠올리곤 한다고 했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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