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결학회, 진본 화엄경 20권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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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글 창제 이전에 한자에 토를 달아 읽는 구결(口訣) 중에 가장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공개됐다. 구결의 가장 초기 형태인 각필(角筆)로 찍은 부호구결(符號口訣)이 다량으로 표시된 진본 화엄경(眞本 華嚴經)20권이 공개돼 고대 한국어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됐다.

이번에 공개된 진본 화엄경 20권은 지난해 7월 일본 고바야시 요시노리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가 부호구결을 처음 발견해낸 고려시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보다 앞서는 것이어서 1천년 전 한국의 음운과 문법, 방언과 존칭 등 언어현상은 물론 일본어와의 영향관계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성암고서박물관(관장 조병순)이 소장한 진본 화엄경 20권을 구결학회 회장 남풍현(단국대)교수를 비롯, 김영욱(서울시립대).이승재(가톨릭대).윤행순(한밭대)교수 등과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를 지난 14일 구결학회 공동연구회에서 정재영(기술교육대)교수가 발표함으로써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구결은 한자를 우리 말로 읽기 편하게 조사.조동사.경어 등 토를 달아놓은 것으로, 주로 먹으로 점과 선을 표시한 석독구결(釋讀口訣)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고바야시 교수에 의해 석독구결에 앞서 상아.대나무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필기구로 한자의 상하.좌우 등 21곳에 점 1~2개를 찍거나 선을 그어 토를 다는 부호구결이 처음 발견돼 구결 연구에 새 장을 열었다.

특히 40년 전 일본 문헌에서 한문 훈독에 사용한 일명 오코토점이 처음 발견됨으로써 이같은 언어 현상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라는 게 일본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한국 고대 문헌에서 부호구결을 발견함으로써 이같은 정설이 뒤집힌 것은 물론 한국의 구결이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해 일본의 학계와 언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정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진본 화엄경 20권은 석가탑에서 발굴된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751년)~초조대장경(11세기)사이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

제목을 표시하는 방법이나 한자의 서체, 특히 '障(장)' 을 '' 으로 표시하는 이체자(異體字) 등에서 신라 사경(寫經)에서 보이는 언어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구광정다라니 외에 초조대장경에 앞선 고서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진본 화엄경 20권은 서지학적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여기에서 발견된 각필 부호가 구결의 사용시기를 더욱 앞당길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남풍현 교수는 "이번 자료는 현재 구결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시의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귀중한 것" 이라며 "이 자료를 바탕으로 향후 각종의 부호구결이 어떤 말을 표시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과 아울러 한.일간 문화 생산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 이라고 전망한다.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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