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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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장 붉은 갑옷

우에스기는 이미 다케다 신겐이 애지중지하던 애첩 중의 하나를 밀정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때 우에스기와 다케다 신겐은 '가와나카지마(川中島)' 에서 11년 동안 여섯번이나 싸움을 벌였는데 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은 오른쪽 어깨 위에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

즉 우에스기가 보낸 자객의 습격을 받고 어깨를 베였던 것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신겐은 그 즉시 '닌자(忍者)' 란 이름의 독특한 무사집단을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었다.

검은 복면을 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림자처럼 숨기고 천장과 지붕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어느 순간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리는 이 특수 무사들은 주로 적에 대한 방화와 정찰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며 또한 신겐의 주위에 항상 숨어서 불의의 기습을 노리는 자객으로부터 주군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 무사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우에스기는 그 즉시 그 애첩에게 전문을 보내어 밤마다 찾아오는 신겐의 몸을 더듬어 과연 오른쪽 어깨 위에 상처가 있는가 없는가 확인해 볼 것을 명령했다.

언제나 처소로 찾아올 때는 온 방의 불을 끄고 닌자들의 호위를 받고 입실하였다가 날이 밝기 전에 사라지는 신겐이었으므로 첩들은 주인의 용모보다는 체취와 여인을 다루는 독특한 애무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특히 어깨 위에 난 상처는 육체관계를 맺는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에스기의 명령을 받은 애첩은 찾아온 '가게무샤' 의 몸을 혀로 핥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애첩으로부터 혀로 온몸을 핥는 애무를 받기 좋아하던 신겐이었으므로 소실이 가게무샤의 벗은 몸을 핥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성행위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애첩은 찾아오는 어두운 그림자가 왠지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인만의 독특한 냄새가 없었으며, 길들여진 여인의 몸을 다루는 솜씨 어딘가에 미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게무샤' 의 몸을 핥던 여인의 혀는 오른쪽 어깨 위에서 멈칫거렸다.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까칠까칠한 감촉, 자객으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어깨 위에서부터 비껴내린 칼이 만들어낸 상처 자국. 그 자상(刺傷)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가게무샤' 의 어깨를 핥는 여인의 혀끝이 순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우에스기는 들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리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다케다 신겐이 죽었다. 아아,가이의 호랑이가 죽고 말았다. "

기록에 의하면 우에스기는 사흘 동안 자신의 성내에 틀어박혀 흰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슬피 울면서 전 영토 내에서 노래와 춤을 금지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다케다 신겐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이 바로 평생의 숙적, 우에스기 겐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겐의 죽음이 이처럼 알려지기까지는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오다와 도쿠가와의 연합군은 결국 다케다 신겐의 가게무샤, 즉 그림자무사에 속아서 2년 동안 숨도 못 쉬고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쿠가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에 2년 동안이나 농락당하고 있었다면 다케다 신겐의 '풍림화산' 깃발과 '붉은 갑옷' 을 전리품으로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도쿠가와의 현실주의자적 면모가 드러난다. 다케다 신겐의 '어기순무(御旗盾無)' 를 전리품으로 빼앗기 위해 혜림사에 불을 지르고 온 일족들을 불태워 죽인 그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자신마저 부장 아케치의 습격을 받아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비참하게 죽어간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도쿠가와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 '어기순무' 를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그 깃발과 붉은 갑옷을 획득하는 대신 다케다 가문의 그 무적기마군단과 그 붉은 갑옷이 의미하는 불굴의 무사도 정신을 그대로 유산으로 받아들여 다케다 가문의 정신적 후계자로 거듭 나게 되었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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