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어제의 동지들 오늘은 난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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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야(在野)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0년대 초까지 제도 정치권에 대한 거대한 도전세력이었다. 1989년 창립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은 그 전의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등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여러 투쟁노선이 합류한 재야운동권의 집결체였다.

2001년 오늘, 재야.학생운동권 주도세력의 상당수가 현실정치에 몸담았다. 지난해 16대 국회에 진출한 2백73명 중 최소한 26명이 운동권 출신이다.

이들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 김영삼(YS).김대중(DJ)씨의 집권, 정보화.세계화 등 시대변화 때문에 '투쟁에서 참여로' 바꿨다고 말한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정치권의 이념공간을 넓혔다" 는 긍정적 평가와 "3金정치 연장을 도왔다" 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최근 여야간 공방의 선봉에 선 인사들 중 재야 출신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또 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자신을 비판한 운동권 선배 장기표씨에게 "맛이 갔다" 고 공격하는 등 재야 출신간의 갈등 양상도 이제는 보편화했다.

◇ "주변에서 중심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재야 운동권 출신들은 정책결정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그 중에서 이해찬 의원은 교육부 장관.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으며 끝없이 개혁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주도한 전교조 합법화, 교원정년 축소, 의약분업 강행 등은 아직도 찬반 논쟁이 뜨겁다.

같은 당 김근태 최고위원과 이창복.송영길.임종석 의원은 당정의 보안법 개정, 반부패 기본법 제정 등에 앞장서고 있다.

한나라당에선 김일성 사망 때 조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부영 부총재를 비롯, 김부겸.안영근 의원 등이 남북문제에 유연한 대처를 강조하고 있다.

신계륜(민주당)의원은 "재야운동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키고 이념논의의 공간을 넓힌 것은 분명하다" 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이창복.송영길.김부겸.심재철(한나라당)의원 등은 현재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재야출신〓도덕성' 이라는 이미지에 상처가 생겼다.

재야 출신 의원들의 초당적 모임도 있다. '화해와 전진포럼' 과 '정치개혁모임' 이다. 이들은 보안법 개정 등을 함께 주장하고 있으나 큰 영향력은 갖지 못하고 있다. 김영춘 의원은 "의원들 소속당의 당론과 분위기에 눌려 제 목소리를 못낸다" 고 토로했다. 현실정치의 힘에 자주 압도당한다는 얘기다.

이부영 의원은 현실정치에 대해 "한마디로 돈정치.보스정치.3金정치" 라고 말했다. 김근태 의원도 "최대의 정적(政敵)은 돈" 이라고 했다.

재야의 정치참여에 대해 서강대 손호철(孫浩哲.정치학)교수는 "재야 정치세력이 3金정치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역주의 구도에 맥을 못추고 있다" 며 "3金씨의 울타리에 안주하는 재야 출신은 성공하고 그에 맞서는 사람은 실패하는 게 정치 현실" 이라고 지적했다. 孫교수는 "재야 출신이 정체성을 살려 나갈 힘있는 정치그룹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고 충고했다.

◇ 50대의 구(舊)트로이카와 30대의 신(新)트로이카〓전민련을 함께 이끌며 재야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김근태.이부영.장기표(국가복지당 창당 준비중)씨는 각각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성격.노선.양金씨와의 관계가 달랐기 때문" 이라는 평가다.

87년 대선 때 김근태 최고위원은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에서 DJ를 지지했다. 그는 그 후에도 정권교체 우선론과 이를 위한 민주세력 연합론을 폈다. 이부영 부총재는 87년 후보단일화 운동이 실패하자 DJ.YS를 모두 비판했다.

그는 91년 통합민주당 창당시 DJ측과 합류했다가 95년 DJ의 정치 재개에 반발, 합류를 거부했다. 장기표씨는 민중.진보를 표방하는 독자정당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張씨의 세차례에 걸친 국회 진입 노력은 실패했다.

30대의 '신트로이카' 로 분류되는 송영길(민주당).김영춘(한나라당)의원과 이정우 변호사는 84년에 각각 연세대.고려대.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여야로 갈린 宋.金의원과 달리 李변호사는 '80년대 세대의 정치주역화' 를 주장하며 '제3의 힘' 이라는 신당준비체를 만들었다.

30대의 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선배들보다 이념에 대한 집착이 덜하다. "이념문제로 방황을 많이 했었으나 90년 이후에는 현실 속에서 합리적인 개혁을 추구하기로 했다" 고 원희룡(한나라당)의원은 말한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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