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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의기양양한 부시 그리고 북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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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조지 W 부시는 지난 4년 동안 "우연한 대통령"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는 2000년 대선 때 유권자 전체투표에서 앨 고어에게 50만표를 뒤지고도 플로리다에서 537표를 더 얻었다는 대법원의 판정으로 당선됐던 것이다. 연방 대법원 판사들의 다수가 공화당 성향이 아니었다면 플로리다의 재검표로 당락이 뒤집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부시는 "우연한 대통령"이라는 빚을 갚고도 남는 득표를 했다. 전체투표에서 그는 존 케리를 380만표나 앞섰다. 미국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큰 표차다. 63%의 투표율도 40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

테러 전쟁에 대한 지지로 해석

대선에서 크게 이긴 부시의 '째지는' 기분은 그의 대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잘 드러났다. 그는 유권자들로부터 힘(Capital)을 부여받았고, 그 힘을 잘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지난 4년 동안 비판받은 일방주의 외교를 수정할 생각이 없음을 암시했다. 다시 말하면 부시는 선거결과를 9.11 이후 자신이 수행 중인 3대 전쟁-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두 개의 뜨거운 현안이 테스트 케이스로 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이 대권(Mandate)을 위임받은 부시가 내년 1월 총선거를 앞두고 악화 일로를 걷는 이라크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북핵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라크에서 부시는 시간을 끌지 않고 수니파 저항과 테러의 중심지 팔루자로 돌진했다. 팔루자의 완전 장악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팔루자를 평정하면 북부와 쿠르드 지역에 제2, 제3의 팔루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이라크 전역이 팔루자가 되어 내년 총선을 치르지 못할 수도 있다. 부시는 유권자들에게서 부여받은 힘을 믿고 팔루자 공격을 강행했다.

팔루자 공격은 그 자체의 성패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드러난 부시의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부시는 자신의 낙선을 기대한 프랑스와 독일 같은 올드 유럽의 지원 없이도 이라크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우리의 관심은 재선된 부시의 자신감이 북핵협상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다. 정치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 부시는 북한에 관대해질 것인가. 아니면 더는 대선 치를 일 없어 여론의 눈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부시가 4년 전 취임 초의 대북 강경론으로 돌아갈 것인가. 대답은 부시 정부뿐 아니라 북한의 태도와 한국과 중국의 역할에 달렸다.

북한은 4차 6자회담까지 무산시키면서 부시의 낙선, 케리의 당선을 기다렸다. 북한은 지금 크게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 일보 직전까지 가 있다. 핵무기를 가져서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파키스탄 모델로 가고 싶은 충동이 클 것이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바보들이 아닌 이상 핵보유는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확실한 초대장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북한이 핵물질을 테러 집단이나 테러 지원국에 수출하려고 한다면 미국의 물리적인 대응조치는 즉각적일 것이다. 한발 잘못 디디면 재앙을 부르는 것이 북핵이다.

미국 우경화 간과하면 안돼

그래서 시간이 많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핵문제가 구조적으로 안정됐다고 말했다. 북한이 벼랑끝 외교의 무모함을 알고, 미국이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북한에 강경책을 못 쓴다는 현실을 반영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대선에서 나타난 미국 사회의 보수.우경화가 마음에 걸린다. 특히 부시에게 표를 몰아준 기독교 우파의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들은 북한같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나라, 이라크같이 하나님이 아닌 신을 믿는 나라는 파괴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부시의 팔루자 공격에 내심 환호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다음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부시는 보수화된 미국 사회의 지지를 업어 의기양양한 부시다. 부시의 '북한 질주'를 미리 차단하여 다자협상의 틀을 지키는 것이 노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