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울 아빠는 재수없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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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곱 살 난 딸아이와 둘이 살고 있다. 사정이 있어서지만 '아들보다 딸이 키우는 재미가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온 뒤 뭐가 불만인지 쉴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아빠, 수염 좀 깎고 다녀. 아빠는 할아버지야? 머리 좀 멋있게 해봐!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

유치원에서 무슨 소릴 들었기에 야단이람. 그냥 그러려니 해도 '후줄근한 아빠의 행색이 창피했나'하는 생각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내일은 이발이라도 해야지.' 마음을 추스른 뒤 딸을 씻기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평소 같으면 '잠이 안온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산을 떨 텐데 오늘은 어째 조용하다. 슬며시 딸의 방을 살펴 봤다. 불을 끄면 무섭다고 잠을 못 자던 애가 웬일인지 어두운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이마를 짚어보고 내일 유치원 준비물을 챙기려고 가방을 열어보니 일기장이 있었다. 오늘은 뭘 쓰셨나, 우리 공주님.

'11월 5일 우리 아빠는 재수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창피하다. 그래도 우리 아빠는 좋은 사람이다'.

재수없는 사람? 불이라도 붙은 양 낯이 뜨거웠다. 자는 딸을 흔들어 깨워서라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오전 8시. 실례를 무릅쓰고 유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기장 얘기는 차마 못 꺼내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별일은 아니고…." 말꼬리를 흐리던 유치원 선생님은 "한 여자아이가 '재수없는 남자가 뭐냐'고 묻기에 설명할 말이 없어 '머리도 안 잘라 지저분하고 옷도 안 갈아입어 단정치 못하며 자기 일도 열심히 안 하는 남자를 말하는데 나쁜 말이니 쓰지 말라'고 했다"고 들려줬다.

그랬더니 딸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이다. 그랬을 거다. 딸의 눈에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아빠가 재수없는 남자에 해당한다고 느꼈을 거다. 눈물이 핑 돌았다. 꾹 참고 딸아이를 깨워서 여동생 집에 보냈다. 유치원에는 아파서 못 보낸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고는 모처럼 이발에 염색까지 했다. 목욕탕도 다녀 오고 평소 안 입던 정장까지 쪽 빼 입고 동생 집으로 달려갔다.

딸아이가 밝은 얼굴로 날 반긴다.

"어, 아빠가 오빠 됐네." "뭐라고, 오빠?"

그제야 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일기장을 못 봤더라면 딸에게 오랫동안 재수없는 남자로 남을 뻔했다. 언젠가 딸아이가 '재수없다'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겠지. 그때 딸아이가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통해 재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함께 얻었으면 좋겠다.

장인삼 (39.경기도 안산시 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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