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전망대] 지도자복 없는 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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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사람마다 각기 복(福)이 따르듯 국민에게도 복이 있다.

기후 좋고, 자원 많고, 땅 넓은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이 첫째 복일 게다.

이건 팔자 소관이라고 쳐두자. 그러나 국민이 지도자를 잘 만나는 복은 '후천적' 이다. 잘만 고르면 생각 제대로 박히고 능력 출중한 지도자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잘 골랐다" 고 좋아했다가 "속았다" 고 가슴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지금 대만이 그렇다.

지난해 3월 반세기 만의 정권교체를 일궈냈을 때 대만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젊고 패기만만한 정.부 총통이 나왔으니 "이제 세상이 달라지겠거니" 했다.

그로부터 1년을 훌쩍 넘긴 지금, 대만은 어떻게 됐을까. 달라지긴 했다. 주가가 반으로 떨어지고, 환율은 치솟고, 이민행렬은 늘어만 간다. 거리는 실업자들의 시위로 메워지기 일쑤다.

천수이볜(陳水扁)총통은 정치력과 인재발탁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래도 그는 야당을 설득하고, 직접 걸레를 들고 차를 닦고, 청소 미화원들과 휴지를 줍는 등 어떻게 하든 잘 해보려는 모습은 보인다.

문제는 부총통이다. 뤼슈롄(呂秀蓮)부총통은 당선 직후 陳총통 못지 않은 기대를 모았다. 陳총통의 대만대 법대 선배이기도 한 이 미혼의 여성 부총통은 인권운동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呂부총통은 취임 초부터 끊임없는 설화(舌禍)로 흙탕물을 일으켰다. 근거없는 총통의 섹스 스캔들을 은밀하게 언론사에 제보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오죽하면 그녀에게 '큰 주둥이(大嘴巴)' 란 별명이 붙었을까. 대만 여성계도 등을 돌렸을 정도다.

그녀가 이번에 또 일을 저질렀다. 외교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수준이다.

태풍 '도라지' 로 대만인들의 피해가 심각하자 呂부총통은 "대만은 땅이 좁은데 인구는 너무 많다. 그러니 국민들은 차라리 이민가는 게 낫겠다" 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음부터다. 呂부총통은 "중남미 소국 벨리즈가 이민지로는 최적이다. 한 5만명쯤 이민가면 그곳 총통을 마음대로 뽑을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제안했다.

멕시코와 과테말라 사이에 끼어 있는 벨리즈는 소국이지만 대만에는 28개국밖에 안되는 수교국 가운데 하나다. 대만이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나라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대만 총통부는 즉각 "부총통의 진의가 잘못 표현됐을 것" 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총통부 관계자는 "제발 (부총통이)가만히 있어줬으면 좋겠다" 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진짜 딱한 건 그런 부총통을 지도자로 둔 대만 국민들일 것이다.

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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