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대학의 겉치레 국제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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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계화의 바람 속에 극심한 영어 열풍이 사회를 휩쓸고 있다. 대학생과 직장인은 물론 유치원생까지 영어에 매달리고 있다.

영어때문에 사춘기의 자식들을 이역만리 타국에 보내 생이별을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으니 영어가 삶의 유일한 목표가 돼버린 듯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전공을 영어로 가르치라 하고, 마구잡이로 국제대학원을 만들더니 졸업요건에 토플을 넣어 한번에 16만원이 넘는 수험료를 챙기는 ETS라는 미국 회사만 즐겁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인 교수와 학생을 모셔오고, '영어 공용 캠퍼스' 를 만들겠다고 야단이다. 우리 학생들의 등록금은 크게 올리겠다는 국립대학들이 외국 학생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모셔오겠다고 한다. 모두가 대학의 국제화 때문이라고 한다.

거름 지고 남 따라 장에 가길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분명 정상이 아니다. 현실성과 효율성은 그만 두고라도, 왜 칼텍의 교수가 우리 대학을 '자기 나라의 대학' 인 것처럼 느껴야 하나□ 이러다가는 기업과 마찬가지로 대학도 선진국에 맡기자는 주장이 나올 것 같다. 우리의 말과 글이 심하게 훼손되는 현실은 그냥 두고 '영어 강국' 을 외치는 우리가 정말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인가□

이미 우리 대학은 70년대의 실패를 무시하고 다시 도입한 학부제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 기업 현장과의 격차 때문에 고전하던 이공계 학과들이다.

학생 확보가 어려워졌고, 전공 교육의 양도 줄고 수준도 낮아져 지식기반 사회에 필요한 고급인력 양성이 어렵게 됐다. 무원칙한 '두뇌 한국21(BK21)' 과 무분별한 벤처열풍도 대학의 균형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대학이 스스로 교육시설 확충, 인력확보, 제도개선은 제쳐두고 겉치레 국제화에 매달리고 있다. 외국과의 협상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전문가들의 영어가 짧아서가 아니라 전문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국제화도 영어가 아니라 대학의 내실이 문제다. 소련의 주요 학술지를 통째로 번역해 보급하는 미국과 영어 논문을 수정해주는 전문인력을 활용하는 일본의 지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택시기사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보다 휴대폰을 이용한 통역서비스가 얼마나 더 효율적인가?

세계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위한 연구만이 대학의 역할은 아니다. 세계 수준의 학문을 소화해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교육에 필요한 우리말 전문용어나 전공교재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세계화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세계 수준의 사상과 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의 문화와 기술이다. 영어로 요란하게 치장한 속빈 강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영어를 쓰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대학을 무조건 흉내낼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영어를 쓰고 노벨과학상 수상자까지 배출했으면서도 실제로 국민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는 인도의 대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프로야구나 축구에서처럼 '돈' 으로 유치한 외국인 교수와 학생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 · 이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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