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르는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 패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을 뒤집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공정위가 기업에 무리한 제재를 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때문에 공정위가 기업에 대한 제재보다는 기업 간 경쟁이 활발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일 서울고법은 공정위가 KT에 물린 307억원의 과징금 중 24억원만 내도록 판결했다. 공정위는 KT가 자회사와만 계약하고 용역비를 지나치게 많이 줬다며 과징금을 물렸다. 그러나 법원은 전국의 공중전화를 관리할 수 있는 곳은 KT 자회사밖에 없고, 공정위가 제시한 '정상 용역비'도 객관적인 시장 가격으로 보기에 근거가 부족하다며 KT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 서울고법은 공정위가 현대.기아차에 2002년 9월 부과한 과징금 75억원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도 9월 공정위가 삼성SDS에 부과한 158억원의 과징금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다른 사업자의 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소비자 선택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 공정위 패소가 많은 이유는=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바로잡는다는 당위에 집착해 법 적용을 꼼꼼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권오승(법학)교수는 "정부가 정책적인 판단에만 치중할 뿐 제재 기준이나 절차에 대해선 무신경했다"며 "공정위의 패소가 많은 것은 법치주의가 정착돼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 규정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공정거래법은 사업자 간에 명시적인 합의가 없어도 담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공정위는 '추정'조항과 관련된 다섯 건의 사건에서 패소했다. 공정거래법의 추정 조항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정부 방침대로 움직였다가 공정위로부터 제재당한 일도 있다. 기업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경우다. 삼성화재 등 11개 손해보험사는 2000년 금융감독원 권고에 따라 보험료율을 3.8% 인상했으나 담합이라는 이유로 공정위로부터 70억원대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2002년 이를 취소했다.

최근에는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에 대한 법원과 공정위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공정위는 계열사와 계열사 외 다른 회사에 대한 차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법원은 내부거래가 시장에서 경쟁을 제한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다. 공정위는 삼성SDS가 특수관계인에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저가에 발행한 점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법원은 이 행위가 다른 경쟁 사업자의 활동을 저해하지 않았다며 공정위 결정을 취소했다.

◆ 개선 방안은=전문가들은 공정위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공정위가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기업이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인 건 좋지만 이것이 과하면 정상적인 거래까지 옭아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른법률의 임영철 변호사는 "과도한 규제는 시장의 창의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주선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추정 조항을 남발하다 보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며 "공정위는 기업을 규제하기에 앞서 경쟁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규제부터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법원이 공정위와 다른 판단을 하는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판례가 더 쌓이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라며 "과징금 산정 기준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기업의 반론권을 확대하는 등 기업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