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0월 예정 대선 앞당기기로 … 국정 공백 불가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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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0일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폴란드가 충격에 휩싸였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사고 후 일주일간 애도 주간을 선포하는 한편 이날 오후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폴란드 정부는 올해 10월에 치를 대통령 선거를 조기에 실시하기로 했다고 이날 발표했다. 파벨 그라스 정부 대변인은 “헌법에 의거해 조기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며 “그때까지는 브로니스와프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당국은 사고기의 비행기록장치(블랙박스)를 회수해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주폴란드 한국대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은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 집에 머물며 TV 속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고기 탑승 인원을 놓고는 처음에 87명이, 이후에 132명이 탄 것으로 전해지는 등 한때 혼선이 빚어졌다.

폴란드 내각은 이날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헌법에 따라 하원의장인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기로 결정했다. 코모로프스키 의장은 올 10월 예정된 차기 대선의 여당 후보로 뽑힌 인물이다. 폴란드는 총리가 내각을 이끌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내각제 국가이지만 국가원수의 지위를 가진 대통령도 외교안보 분야에서 권한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 유고 사태가 폴란드 정국에 미치는 후유증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바르샤바 시장을 거쳐 2005년 대선에서 승리했던 카친스키 대통령은 1980년대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자유노조 출신으로 폴란드 국민 사이에서 지지와 존경을 받아 왔다. 그래서 그의 사망은 향후 정국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대통령과 함께 정부 고위 인사도 상당수 사망함에 따라 정치·행정 전반에 상당 기간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사고 직후 각국 정상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는 깊은 애도를 표했으며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며 애도를 표명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성명을 통해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고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카친스키 대통령은 조국 폴란드에 헌신했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전체주의에 대항해 투쟁한 인물”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유럽연합(EU)도 폴란드 국민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중앙은행 총재·국가안보국장 탑승
사고 비행기에는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 외에도 상당수 정·관계 요인들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함께 사고를 당한 리사르트 카초로브스키(89)는 영국 런던에서 45년간 지속된 폴란드 망명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다. 그는 90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자유노조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사퇴했다.

슬로보미르 스크르치펙(47) 중앙은행 총재는 폴란드 글리비체에 있는 슐레지엔 공과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귀국 후 정계와 금융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2007년 1월 10일 하원의 지명으로 중앙은행 총재에 올랐다. 폴란드 중앙은행은 피오트르 비시오렉 부총재가 당분간 총재 권한을 대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예리치 스마이진스키(58) 하원 부의장은 민주좌파동맹(SLD) 소속으로 90년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했으며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한 뒤 2007년 6월 하원 부의장에 올랐다. 민주좌파동맹은 지난해 12월 전당대회에서 올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 후보로 스마이진스키 부의장을 선출해 놓은 상태였다.

알렉산더 츠시글로(47) 국가안보국장은 2001년 법과 정의당(PiS) 소속으로 처음 하원에 진출한 뒤 2007년 2월부터 11월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프란시스첵 가고르(59) 군 참모총장은 2003년 유엔 이라크·쿠웨이트 국경감시군(UNIKOM) 사령관, 골란고원 유엔휴전감시군(UNDOF) 사령관,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및 EU 폴란드 군사 대표 등을 거쳐 2006년 참모총장에 임명됐다.

이 밖에도 다데우스 플로스키 주교, 안드르제이 프르제보즈니크 보훈장관, 안드르제이 크레머 외무차관, 야누츠 쿠르티카 과거사연구소장, 야누츠 코카노브스키 민권담당관, 프르제미슬라브 고시브스키 의원, 츠비그뉴 바서만 의원, 그레제고르츠 돌이아크 의원, 파벨 비피치 대통령 보좌관, 마리우스 한트츨릭 대통령 보좌관 등 폴란드 최고 엘리트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계 탑승자 없다”
카친스키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단에 한국계 인사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한국 기업 관계자 등이 동행했을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주폴란드 한국대사관의 확인 결과 한국계 인사는 탑승자 명단에 없었다. 한국대사관의 이경렬 공사는 카친스키 대통령의 서거가 한국·폴란드 협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음은 이 공사와의 일문일답 요지.

-한국계 인사의 피해는 없나.
“카친스키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특별기이기 때문에 일반 승객이 없으며, 방문단에 한국계 인사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과 진행 중인 외교·통상 현안에 어떤 영향이 있나.
“2008년 12월 카친스키 대통령의 방한 때와 지난해 7월 이명박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 때 협의된 경제 협력 사안들이 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 원전 건설 문제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폴란드는 대통령이 아닌 총리가 주요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

-희생자 중 특별히 한국과 가까운 인사들은 없나.
“카친스키 대통령은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 왔다. 열혈 반공주의자인 그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늘 관심을 보였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을 방문하고 비무장지대(DMZ)도 둘러봤다. 사고기에 탑승했다가 함께 희생된 합참의장도 당시 대통령과 함께 방한했다. 사고로 숨진 대통령 보좌관 중에도 한국에 애정을 보여 온 인사들이 있다.”

-향후 정국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총리를 역임한 카친스키 대통령의 쌍둥이 형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가 ‘PiS’의 대선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 동생 카친스키 대통령은 연임 희망을 비쳐 왔다. 현재로선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하원의장인 여당 지도자 코모로프스키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고 있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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