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올 때 우산 뺏는 은행에 대처하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1호 30면

여기 밴쿠버에서는 벚꽃으로 뒤덮인 거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구 220만 명 중국인이 70만 명이니 중화(中華)의 상징인 매화(梅花)라면 몰라도 사쿠라(벚꽃의 일본말)는 의외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캐나다정부는 자국 내 일본인들을 격리시키는 비인도적 조치를 취하였고, 종전 후 이들을 위로하고자 벚꽃을 심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김우진의 캐나다 통신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 아니다. 일본에서 정식으로 지명한 나라꽃은 없고, 다만 일본 왕실에서 국화(菊花)를 국화(國花)로 여기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벚꽃을 워낙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를 전 세계에 많이 알린 탓에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던 골프의 창시자’ 벤 호건(Ben Hogan)은 『스윙의 5가지 기본(Five Lessons: The Modern Fundamentals)』이라는 저서에서 좋은 골퍼는 골프스윙의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스윙이 큰 골퍼에게 백스윙을 줄이라고 아무리 충고해도 고칠 수 없다. 백스윙이 큰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스윙 톱(top)에서 손목을 꺾지 못하게 한다든지 다운스윙의 시작을 허리부터 하라는 식의 처방이 필요하다.

금융부문도 마찬가지다. 정상상태(steady state)를 벗어나 시장의 왜곡(market distortion)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방안을 강구하지 않고 결과론적 해석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두 가지 사례를 보자.

정부 관계자들은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고 당부한다. 금융회사들이 기업이 어려운 시기에 대출을 회수하거나 채권의 만기연장을 거부하는 등 자신의 뱃속만 채운다며 질책하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어떤 기업이 은행에서 1년 만기로 대출을 받았다 하자. 1년 이내에 상환할 자금이라면 단기운영자금이다. 그러나 빌리는 기업이나 빌려주는 은행 어느 쪽도 1년이 만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년이 지나면 자동 연장될 것으로 이해한다. 차주는 이 자금으로 1년 이상 잠겨둬야 하는 설비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만기 자동연장(ever-greening)은 금융위기나 경기침체가 엄습할 때 작동을 멈춘다. 대주 입장에서 리스크관리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고 어려워진 기업은 지나친 처사라며 항의한다.

이 기업이 원래 목적대로 대출금을 사용했다면 ‘비 올 때 우산을 빼앗겨도’ 큰 문제가 없을 터이다. 미국의 경우 상업대출(commercial loan)의 70%가 담보대출이며, 담보대출의 대부분이 매출어음 담보부 대출이다. 기업이 현금흐름(cash flow)에 따라 단기 운영자금 위주로 대출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장기 설비투자자금은 내부 유보나 증자를 통하거나 회사채를 발행하여 해결한다. 은행이 장기 설비투자자금을 대출하기도 하나 드문 일이다. 국내 사례는 계수 중심의 성장 일변도 은행경영과 ‘룰(rule)을 지키면 바보’라는 사회풍조가 빚어낸 개그다.

한편 지난 5년 사이 4대 국내은행은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고객에게는 대출을 3분의 1로 축소한 반면 1등급 고객에게는 두 배 이상 확대했다는 통계가 있다. 일부는 영세상인과 중소기업이 갈수록 돈줄을 찾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대형화 정책의 산물로 비판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가계(household)에도 신용배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전까지 개인 또는 중소사업자가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199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머튼(Merton) 교수는 금융회사의 주된 기능을 공급자로부터 자금을 모집(pooling)해 수요자에게 이전(transfer)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과거에는 자금의 모집이 가계의 저축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지고, 자금의 이전은 정부정책 방향에 따라 특정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는 우리나라 가계도 자금 수요자로서의 혜택을 누린다.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자유’에 한걸음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차주의 신용도에 따라 대출 규모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은행마다 차이는 있지만, 5~6등급에 속하는 한계고객의 비율이 현재 60% 정도다. 이들 중 옥석을 가려 일부에게는 대출을 제한했어야 옳다. 과다대출자, 다중채무자의 양산은 초기의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 집행에 기인한다. 늦게나마 금융회사들이 리스크에 기초한 신용할당(credit rationing)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금융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세사업자나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정책금융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6월 지방선거가 끝나면 그동안 미뤄 왔던 부실 저축은행과 건설사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금융경색이 불가피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원인과 결과를 혼돈하지 말고 제대로 밀어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