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권력장악 …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뒤집은 제2의 튤립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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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제2의 튤립혁명(민주 시민혁명)’이 사실상 성공했다. 2005년 부패하고 무능한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대통령을 튤립혁명으로 몰아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61) 대통령이 이번에는 자신의 비민주적 통치와 부정부패 등에 반발한 반정부 시위대에 쫓겨났다. 러시아 인테르팍스와 AFP통신 등 외신은 바키예프 대통령이 1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7일 대규모 시위 사태 이후 수도 비슈케크를 떠나 남부 지역으로 도망쳤다고 전했다. 야당은 전직 외교장관 출신의 인기 여성 정치인 로자 오툰바예바(60)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6개월 이내에 새로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오툰바예바는 8일 오전 시위사태 후 첫 기자회견에서 “모든 권력이 과도정부로 넘어왔다”며 “새로운 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정부가 행정부와 의회 역할을 함께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키르기스 보건부는 “7일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로 75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고 8일 밝혔다. 피신한 바키예프는 현지 언론에 보낸 e-메일에서 “키르기스의 인도주의가 파국을 맞기 직전”이라며 “절대 대통령 직을 내놓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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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정국 장악=오툰바예바는 8일 “바키예프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오슈 인근의 잘랄아바드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통령이 남부 지역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고 말했다. 바키예프는 7일 수도 비슈케크의 유혈 사태 와중에 국방장관 등 소수의 측근들만 거느리고 항공기를 이용해 수도를 탈출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7일 저녁 정부 청사를 장악한 뒤 국영TV 방송을 통해 오툰바예바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개혁 실패와 부패가 몰락 불러=바키예프는 2005년 ‘튤립 혁명’으로 불린 시민혁명 이후 정권을 잡았으나 정치 안정화와 경제 개혁 등에 실패해 결국 또 다른 시민혁명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는 자신이 몰아낸 아카예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부 요직에 아들을 비롯한 친인척을 앉히는 등 정실 인사와 부정부패, 야당과 자유언론 탄압 등의 불명예를 뒤집어 쓴 채 권좌를 떠나야 했다.

야당은 오랫동안 야당 정치인에 대한 탄압 중단과 시민의 권리 보장, 전기·난방·상하수도 등의 공공요금 인하를 요구해 왔다. 올해 초부터 키르기스 정부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소련 시절의 특혜요금을 폐지하고 전기와 난방 요금을 2~5배 인상했다. 바키예프는 또 에너지·통신 등 전략 국영기업들을 민영화 명목으로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팔아 넘겼다. 정부 요직을 아들을 비롯한 친척들에 맡기기도 했다. 국가발전·투자·혁신청청장을 맡고 있던 작은 아들 막심은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투자자금을 혼자서 주물렀다. 이 같은 정부의 전횡과 부패에 야당이 반발하자 바키예프는 주요 야당인사 체포로 맞섰다. 결국 북서부 도시 탈라스에서 6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고 이튿날 비슈케크와 다른 도시로 번지면서 바키예프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러시아 사태 주시=비슈케크 인근 마나스 공군 기지에 아프가니스탄 대(對)테러전 수행을 위한 군수물자 운송센터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은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모담당 차관보가 7일 “미국은 현 정권(바키예프)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이후 추가 논평을 삼가고 있다. 반면 마나스에서 30㎞ 떨어진 곳에 자국 공군기지를 운영하고 있는 러시아는 보다 적극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8일 오툰바예바 과도정부 수반과 전화통화를 하고 “러시아는 과도정부를 지지한다”며 “우리는 키르기스에 필요한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푸틴 총리는 그러나 바키예프 측이 제기한 러시아 배후 개입설은 강하게 부인했다.

유철종·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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