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영화 만드는 데 걸림돌 있다면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허트 로커’는 캐스린 비글로 감독이 ‘K-19’(2002년)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는 “사람들은 영화 한 편이 나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지난 6년이 ‘공백’이 아니라 ‘준비기간’이었음을 강조했다. [케이앤 엔터테인먼트 제공]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도 여성들이 넘기 힘든 벽이 존재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셀룰로이드 천장(celluloid ceiling)’이다. 여성차별을 뜻하는 ‘유리 천장’을 필름의 소재인 셀룰로이드로 바꾼 조어다. 지난달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허트 로커’로 감독상을 받은 캐스린 비글로(59)는 할리우드 최초로 ‘셀룰로이드 천장’을 깬 여성이다.

할리우드에도 여성 감독들은 있다. 하지만 지극히 수가 적고, 대개 로맨틱 코미디(낸시 마이어스·노라 에프런)나 감성적인 드라마(소피아 코폴라)를 선보였다. 비글로는 대표작 ‘폭풍 속으로’(1991년) 등 선 굵고 장쾌한 액션과 장르영화를 선호하는 독특한 존재다. 그래서 별명도 ‘여전사’ ‘여걸’이다. 아카데미 6관왕을 차지한 ‘허트 로커’도 전쟁영화다. 한국 개봉(22일)을 앞두고 그와 e-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아카데미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여성’이라는 영예의 주인공이 된 소감부터 물었다. “여성이 영화를 만드는 데 어떤 걸림돌이 있다면, 전 그냥 그걸 무시해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죠. 첫째, 저는 제 성별을 바꿀 수 없습니다. 둘째, 영화 만드는 일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누가 영화를 만들었는지가 중요할까요? 관객이 제가 만든 영화에 공감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겠죠. 할리우드에 여성 감독들이 더 늘어나야 합니다. 당위가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허트 로커’는 이라크전에 참전한 폭탄제거팀(EOD) 이야기다. 마치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듯한 긴장감으로 두 시간여를 채운다. 팀원 세 명에 집중하며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군상을 다각도로 비춘다. 폭탄제거라는 엄청난 압박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헤쳐나가는 제임스(제레미 레너),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러티), 두 유형 사이에서 갈등하는 샌본(앤서니 매키)이다. 이들은 “현장을 찍는 세 종류의 렌즈이자 전쟁을 바라보는 세 종류의 시각”이다.

이라크전에 투입된 미군 폭탄제거팀을 다룬 ‘허트 로커’. 영어 ‘Hurt Locker’는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를 뜻한다. 눈앞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의 각본을 쓴 마크 볼은 2004년 이라크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영화에는 당시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 있다. “마크 볼의 예전 기사를 폭스TV의 ‘디 인사이드(The Inside)’라는 시리즈물로 만들면서 그와 친해졌어요. 이라크는 제겐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고, 호기심을 강렬히 자극하는 곳이었죠. 그가 바그다드에서 돌아오면 분명히 영화로 만들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그는 “폭탄을 제거할 때 실제로 군인들이 첨단장비가 아닌, 리모콘·펜치·전자시계 같은 일상적인 용품을 이용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었다”고 말했다.

그의 연출 원칙은 “마크의 체험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사실적인 관점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허트 로커’는 폭발음을 빼고는 음악과 음향의 힘을 거의 빌지 않았다. “관객이 마치 주인공들의 군화를 신은 것처럼, 그들의 험비(군용차량)에 탄 것처럼 느꼈으면 했어요. ‘당신은 지금 바그다드에 있고, 당신이 군인입니다’라는 설정이죠. 관객이 네 번째 팀원이 됐으면 했어요. 최대한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요.”

가장 힘들었던 일로 그는 살인적인 더위를 꼽았다. 촬영지인 요르단과 예멘은 섭씨 45도에서 65도를 오르내렸다. 배우들은 45㎏이나 나가는 군용 폭탄제거복을 입고 일사병과 싸웠다.

“이라크에 실제로 들어가려고도 했었어요. 저격 당할 위험이 크다는 얘길 듣고는 포기했죠. 요르단은 안전했고 촬영에 호의적이었어요. 운 좋게 이라크 난민들도 만날 수 있었죠. 그 중엔 배우도 있었어요.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나온 배우도 이라크 난민이었는데, 이라크에서 꽤 알려진 배우랍니다.”

질문지를 보내기 전 그는 미리 “사생활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전 남편이자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맞붙었던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과 관련된 질문을 의식한 듯 했다. 캐머런은 ‘허트 로커’를 보고 “이라크전을 소재로 한 ‘플래툰’(87년 올리버 스톤이 연출한 베트남전 소재 영화)”이라는 찬사를 보낸 바 있다. 혹시나 싶어 전 남편의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보냈지만, 비글로는 답하지 않았다.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