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골프가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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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상선이 한국 영해를 침범한 그 억세게 재수없던 날, 김동신(金東信)국방장관은 남성대골프장에서 2만5천원의 입장료(그린피)를 내고 골프를 쳤다. 현역인 조영길(曺永吉)합참의장은 2만원의 입장료를 냈을 것이다.

같은 날 논산의 계룡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장정길(張正吉)해군참모총장은 1만4천원의 입장료를 냈다. 그들은 입장료 말고 캐디 봉사료로 4만원에서 6만원을 냈다.

김종필(金鍾泌).권노갑(權魯甲).김상현(金相賢) 일행이 지난달 호화판 골프를 친 아시아나 골프장이었다면 회원 아닌 사람은 휴일입장료 16만원에 팀당 캐디봉사료 7만원과 카트사용료 8만원을 냈을 것이다.

군인 전용이 아닌 일반 골프장에서 골프를 한번 치는 데 드는 경비는 그늘집과 식당에서 먹고 마시는 것 빼고 22만원에서 25만원 수준이다. 그날 국방장관과 군 수뇌부가 친 골프는 확실히 귀족운동도 아니고 호화골프도 아니었다.

거기에다 남성대와 태릉과 계룡대 같은 데서 군인들이 골프를 치는 것은 운동이라기보다 비상사태에 대비한 영내(營內)대기 행위라고 한다. 그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거나 처벌이 형식적일 경우 그런 결정의 근거는 아마도 군인골프장에서 군 수뇌들이 치는 골프가 근무의 연장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골프를 한국사회의 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는 사치성 운동이라고 백안시(白眼視)하는 시대는 지났다. 골프를 치지 않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지금은 골프인구 3백만명의 시대라고 말해 골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는가. 한국골프장사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해에 전국 1백54개의 골프장에서 연인원 1천2백만명이 골프를 쳤다. 한국도 골프대중화 시대의 문턱에 와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시절 백악관 정원에 퍼팅연습장을 만들어 놓고 틈만 나면 퍼팅연습을 했지만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노태우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에도 골프연습장이 있었지만 YS가 철거해 버렸다. 이것이 아마도 한국과 미국의 골프대중화의 현주소와 정치문화의 차이 같다.

낮은 70대의 골프실력을 가졌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프린스턴대 총장을 지낸 미국 최고의 지성으로 존경받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약소국가들의 민족자결을 주창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뉴 프런티어 정신으로 미국인들을 열광시킨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골프가 싱글실력이었고, 여자관계 스캔들에 휘말리면서도 미국경제를 장기호황으로 이끈 빌 클린턴 대통령의 골프도 알아주는 실력이다.

결국 이런 얘기다. 윌슨.아이젠하워.케네디.클린턴 같은 미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골프에 탐닉한 데 반해 한국의 군 수뇌들은 북한상선이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알고도 골프를 쳤다.

일진(日辰) 나쁜 날의 우연한 사건같지만 한국사회 일각의 집단 골프중독증과 무관한 것 같지가 않다. 합참의장의 경우는 골프를 마치고도 군 지휘통제소로 가지 않고 집(관저)으로 가버렸다. 지난 2월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총리가 일본의 고교실습선이 미국 핵잠수함과 충돌해 많은 희생자가 났다는 보고를 받고도 계속 골프를 친 사건과 유사하다.

문제의 군 수뇌들은 적정수준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골프를 친 데 대한 처벌이 아니라 정신적인 해이로 인한 사태의 오판에 대한 처벌이다. 그들이 골프 아닌 테니스나 축구를 했어도 결과가 중대한 사태의 오판이라면 처벌 받아 마땅하다.

골프는 영내 대기라는 주장도 남용해서는 안된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항상 경계태세에 있는 이스라엘군의 수뇌들은 주말에는 골프장에서 살아야 하는가. 군의 사기를 빙자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어떻게 안보태세를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명심할 게 있다. 사건에 골프가 끼어들어 여론이 자극을 받고 그들의 해임을 주장하는 야당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는 점을 고려해 그들이 국민정서에 의해 인민재판을 받아서도 안되고, 그들에 대한 처벌이 적정수준을 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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