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어떤 경제를 물려 줄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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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이론에 정치적 경기변동(political business cycle)이란 것이 있다. 요약한다면 집권정당이 재집권을 위해 선거 바로 전에는 경기확장 정책을 쓰고, 선거 후에는 그 확장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경기축소 정책을 쓰게 되므로 자연히 집권 임기를 주기로 경기변동의 한 사이클이 이뤄지게 된다는 것이다. 주로 정당정치가 발달한 민주주의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다. 한국에도 이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인물중심 政黨 이합집산

집권을 위해서는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정치이고 보면 이 이론이 잘 적용되리라는 생각이 앞설 것이다. 그러나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정당이 계속 이합집산하고 또 다음 정권에 어떤 부담을 넘겨줄지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는 다소 다른 형태의 정치적 경기변동이 만들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집권자 중심으로 그의 임기 동안에 경제적 상황이 어떠하였으며 또 다음 정권에 어떤 경제를 물려주었는지에 따라 그 정권의 공과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정권 이후에야 제대로 된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돼 갔으니 그 때부터 정치적 경기변동을 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높은 성장률, 낮은 물가상승률, 큰 국제수지 흑자를 가져오게 한 소위 3저의 혜택으로 과거 유래가 없었던 호황기에 출범했으나, 정권 말기에는 다시 국제수지의 적자와 경기침체를 다음 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노태우 정권은 호황기에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보다 올림픽.북방정책 등 소비 수준을 높이는 일을 공적으로 남긴 셈이다.

김영삼 정권은 그렇게 썩 좋은 경제를 물려받지 못하고서도 우리 경제를 자신의 임기 내에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겠다고 과욕을 부렸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열겠다고 호언하면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내실있는 선진화를 추구하기보다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에의 가입을 서둘러 추진했다.

이런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급한 행위들이 결국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하는 요인이 됐으며, 후임인 김대중 정권에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넘겨주었다. 위기의 한국경제를 전해 받은 김대중 정권은 한국 경제의 위기가 김영삼 정권의 임기 내에서 촉발됐다는 사실을 몹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히 김대중 정권에는 경제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임무는 있을지 몰라도 경제위기를 야기했다는 책임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김대중 정권도 그 임기를 다해가고 있다. 내년부터는 선거전이 시작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소위 레임덕 현상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김대중 정권은 다음 정권에 무엇을 넘겨주게 될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권이 다음 정권에 넘겨주는 가장 큰 부담은 엄청난 국가부채다. 물론 과거로부터 누적돼 온 기업부실과 금융부실을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겠지만 결국 국민들은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으로부터 오는 부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 정권 감안 정책 펴야

김대중 정권이 이러한 국가부채를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을 조속히 매듭짓지 않는 한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공적자금을 방만히 사용함으로써 결국 기업과 금융과 정부의 잘못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떠넘겼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는 대북사업도 정부의 지원으로 시행될 경우 비록 그 자체는 큰 규모의 자금을 소요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국민의 부담을 크게 했다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정권이 이어받을 우리 경제의 모습은 자명해진다. 엄청난 정부 부채, 반복되는 개인 중심의 정권교체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로 인한 저조한 투자와 낮은 경쟁력, 환율의 상승 가능성, 외국자금의 빠른 유출.

이런 경제적 상황이 우리나라에 다시 경제위기를 초래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모든 집권자들이 자기의 임기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음 임기까지도 고려하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좋은 경제상황을 넘겨주고 국민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으며, 그 결과로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성숙한 정치경제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영선 <연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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