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19. 가장 긴 꾸중

어설픈 행자시절, 성철스님의 꾸중엔 은근한 사랑과 관심이 담겨 있었기에 누구보다 많은 꾸중을 들으면서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스님에게 가장 큰 꾸중을 들은 것은 행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백련암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기름보일러 시설이 갖춰져 살림에 큰 불편이 없지만 30년 전엔 전기도 보일러도 없었다. 때문에 땔감 장만은 산중 절간에서 가장 큰 일거리였다. 아침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톱과 낫,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산사의 공동작업인 울력이다. 나는 워낙 그런 일에 서툰데다 큰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무서워 스님들이 나무하러 가는데 따라가지 않았다. 자연히 절에는 성철스님과 나만 남았다.

혼자 좌선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어쩌다 한번씩 큰스님이 문을 열어보곤 했다. 며칠간 아무런 말씀이 없기에 "나 혼자 이렇게 방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되나보다" 고 안심하고 있던 어느날. 여느 때와 달리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큰스님이 눈을 부릅뜨고 들어왔다.

"니는 도대체 어떤 놈이고? 가만 보자 보자 하니, 다른 대중(스님)들은 다 울력 가는데 어제 절에 들어온 놈이 방에 앉아 있어. 당장 일어나 산에 올라가! 대중 울력에 나가란 말이다! 이런 염치없는 놈이 어데 있노. 앞뒤가 꽉 막힌 놈이네. "

말이 별로 없는 스님, 간혹 꾸중을 하더라도 짧은 한마디로 끝내던 스님이 평소와 달리 긴 호통을 쳤다. 산중에 산다는 것은 공동생활을 의미하고, 울력이란 수행 공동체를 유지시켜가는 가장 기초적인 노동이다. 하물며 고된 일을 도맡아야할 행자의 입장에서 울력에 빠진다는 것은 참으로 당돌한 생각이었다. 나는 당장 그날부터 어설픈 나무꾼이 됐다.

산에서 나무를 잘라오면 다시 도끼로 패서 부엌 아궁이에 넣기 좋을 만하게 쪼개야 한다. 도끼질이 숙련된 스님들이 한번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참나무 둥치가 쫙쫙 갈라지는 게 옆에서 보기에도 신난다. 일이 서툰 나는 스님들이 쪼갠 나무를 주워다 쌓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런데 스님들 도끼질이 하도 신나게 보여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팔뚝만한 참나무 가지를 하나 세워놓고 도끼를 휘둘렀는데 그만 둥근 나무에 빗맞으면서 도끼가 내 발등으로 떨어졌다. "꿍"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나는 내 실력을 알기에 믿지도 않았고 또 조심스럽게 내리쳤는데…. 몇 스님이 내 발등을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아득하게 들렸다.

"천만다행이네. 도끼 날이 무뎠는지, 행자 도끼질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랬는지 찍기는 찍었는데 터지지는 않았네. "

얼마 지난 뒤 정신을 차리고 양말을 벗어보니 발등에 주먹만한 혹이 시꺼멓게 솟아올랐다. 욱신거리는 발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새까만 행자가 업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혼자 절뚝거리며 내려와 샘가에서 찬물에 발을 담그고 상처를 주물렀다.

"아무리 그래도 도끼에 발등이 찍혔는데, 아프냐고 물어보는 스님도 하나 없구만. 참 절집 야속하다. "

섭섭한 마음을 억누르며 한참 주무르고 있으니 통증이 가라앉는지 무디어졌다. 큰스님이 어느새 나타나 물었다.

"오늘은 또 무신 일이고?"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

"뭐가 아무 것도 아이고. 발등에 그 시커먼 혹은 와 생겼노?"

달리 둘러댈 말도 없어서 "도끼로 발등을 찍었습니다" 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정을 짐작했다는 듯 성철스님이 혀를 쩝쩝 다시며 한마디 던졌다.

"참 니는 희한한 놈이다. "

짧은 핀잔. 그 속에서도 큰스님의 두터운 정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