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만으론 부족, 겸손과 헌신이 그들을 스타로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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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11면

“유럽과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선수들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매우 잘 적응하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명장 아르센 벵거는 최근 AFP통신을 통해 강한 톤으로 한국 선수들을 칭찬했다. ‘아스널의 감독이 한국 스타들에게 감명받았다(Arsenal manager impressed by Korean stars)’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였다.

아스널 명감독 벵거가 반한 박지성·이청용의 성공 키워드

벵거 감독의 칭찬 속에는 뼈아픈 경험이 잠복해 있다. 특히 박지성에게 두 차례 골을 내줬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박지성에게 선제골을 내줬고, 그 골로 인해 아스널의 탈락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선두권 경쟁이 치열하던 지난 2월 1일에는 쐐기골을 내줘 1-3으로 참패했다.

이청용이 볼턴에서 보여준 활약은 그에게 확신을 심어준 것 같다. 벵거 감독은 이청용이 “감독이 신뢰할 만한 선수”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한국선수들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관찰하겠다”고 다짐했다. AFP는 이 말을 벵거 감독이 한국 선수를 영입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봤다. 벵거 감독은 TV해설자로 남아공에 간다.

한국 선수의 무엇이 벵거 감독을 매혹시켰을까. 그를 매혹시킨 요소들을 짚으면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는 한국 선수들의 성공 공식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벵거 감독은 박지성을 평가하면서 키워드를 묻어 놓았다.

“열심히 뛰는 선수이며 헌신적이고 기술도 꽤 좋다. 중요한 골을 넣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우리와의 경기에서였다. 나는 그의 능력을 확신한다. 그는 훌륭한 자세를 가진 선수다(he is a very hard working player who sacrifices for the team but as well has some good skills. He has scored some important goals - unfortunately against us!. I am convinced by his quality, he has a top-level attitude.)”

능력은 분명히 보여준다
박지성은 벌써 5시즌째 맨유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 박지성이 입단한 이후 맨유는 프리미어리그에서 3차례, 리그컵 3차례,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클럽 월드컵 각각 1차례 등 모두 8번이나 우승컵을 품었다.

지난달 22일 리버풀과의 경기가 끝난 뒤 BBC에 출연한 해설가들은 박지성이 “선수들이 좋아하는 선수”라고 표현했다. 선수들의 의견과 같다. 맨유의 리오 퍼디낸드는 “팬들은 최근 박지성이 골을 넣었기 때문에 그를 주목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최고의 남자(top man)이며 최고의 선수(top player)다. 맨유 동료는 일반인들이나 미디어가 박지성을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프리미어리그 팬들이 박지성의 플레이를 통해 받는 인상은 희생적이라는 것이다. 골키퍼와 1대1로 마주 서는 골 기회가 올지라도 텅 빈 골문을 마주한 동료가 있다면 그에게 패스한다. ‘킬러 본능의 부재’라는 비판을 살 수도 있지만 팀은 안전하게 1골을 얻는다. 지금은 함부르크에서 뛰는 니스텔로이가 이런 골을 숱하게 챙겨 넣었다.

박지성은 어떤 역할에 대해서도 불평한 일이 없다. 축구 선수의 꿈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양복을 입은 채 지켜보고도 불평하지 않았다. 출장 시간과 재계약 문제 등으로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들다가 지역 라이벌팀 맨체스터시티로 옮긴 테베스와 박지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선수다. 팀, 구단, 감독과 동료를 위한 헌신은 변방에서 날아온 외국인 선수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바꿔 놓는다.

승부처에서 번득이는 킬러 본능
단지 헌신만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팀이 이겨야 하고 이긴 경기에서 기여해야 한다. 박지성이 지난달 22일 리버풀과 경기에서 다이빙 헤딩슛으로 역전 결승골을 터트린 후 영국 미디어는 스포츠면 헤드라인에 ‘한국 메가 스타의 조용한 쇼핑은 끝났다’(더선), ‘톱도그(Top dog:선두에서 이끄는 승자) 박이 라파옐 감독을 무참히 격파하다’(데일리스타)라는 굵은 활자를 토해냈다. 퍼거슨 감독은 지난달 31일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원정경기에 박지성을 선발로 기용했다. 경기 하루 전 열린 기자회견에는 박지성과 함께 참석했다.

박지성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 “박지성도 예전엔 별 볼일 없었다”는 말이다. 박지성이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은 시기가 있긴 하지만 결코 재능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92년 박지성은 우수 유소년 선수를 표창하는 ‘차범근 축구상’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유소년 선수 랭킹 5위 안에 들었다는 뜻이다.

이청용의 재능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청용의 초등학교 시절 은사인 김용운 씨는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늘었다. 어느 날에는 가르치지도 않은 헛다리 짚기를 해 놀랐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은사 이찬행(현 재현고 감독)씨는 “공을 앞에 두고 오른발로 접는 동작을 가르쳤는데 바로 뒤 연습경기에서 공을 뒤에 두고 발뒤꿈치로 접는 응용동작까지 성공시켰다”고 회상했다.

지난 1월 31일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이청용의 40m 단독 드리블은 프리미어리그를 놀라게 했다. 하프라인부터 달리기 시작해 3명의 수비수를 농락했을 뿐 아니라 골키퍼까지 제쳤다. 골라인 앞에서 간신히 공을 걷어낸 수비수 때문에 골만 못 넣었지 마라도나나 메시의 드리블 못잖게 현란했다. 지금도 인터넷 동영상을 뒤지면 프리미어리그의 명장면으로 높은 클릭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청용은 프리미어리그에 첫발을 내디딘 올 시즌 2일 현재까지 벌써 5골 8도움을 기록하고 있다. 박지성이 지니고 있던 한 시즌 최고 기록 2골 7도움(2005~2006시즌)을 가뿐히 넘어섰다.

팀훈련 끝나도 개인 체력훈련
박지성이 교토 퍼플 상가에 갓 입단한 2001년. 박지성의 동료 안효연은 “지성이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너무 많이 해 감독에게 혼났다”고 말했다. 축구 선수들에게 훈련은 샐러리맨들이 근무를 하는 것과 같다. 감독이 훈련을 하루 쉰다고 하면 선수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하지만 박지성은 지금도 팀훈련이 끝나면 개별 훈련을 한다.

이청용은 지난해 볼턴에 입단하자마자 피지컬 트레이너를 찾아가 “체력과 체격을 키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남보다 일찍 훈련장에 나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몸관리에 빈틈이 없으므로 몇 년 후면 뼈가 여물고 근육도 단단해진 ‘몸짱’이 돼 있을 것이다. 이청용의 아버지 이장근(50세)씨는 “명절 때 친척 어른이 주는 술도 안 받아 먹는다”고 귀띔했다.

귀네슈 전 FC 서울 감독은 지난해 “재능이 있으면 스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수퍼 스타가 되려면 인성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귀네슈 감독은 “당신이 말하는 인성이란 뭐냐”는 질문에 “감독ㆍ동료ㆍ미디어ㆍ팬을 대하는 태도, 갑자기 스타가 돼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주변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 등 모든 것이 포함돼 있다. 축구를 잘하려면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어떤 친구와 어떻게 노는지도 인성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 중 가장 빼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로 이천수를 꼽았다. 이천수는 2003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로 진출했다. 박지성보다 먼저 소위 말하는 빅리그에 진출한 셈이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이후에도 네덜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 가는 곳마다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이천수는 모든 게 자신을 위주로 돌아가야 제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다. 이게 그의 한계였다.

눈물 젖은 빵 먹어본 이청용
박지성에게는 설기현처럼 강인한 체격도, 이천수처럼 타고난 재능도, 이동국처럼 강력한 슈팅도 없었다. 그래서 박지성은 공을 잡기 전부터 패스할 곳을 찾았다. 패스를 한 뒤엔 곧바로 패스를 받을 가장 좋은 위치로 달려갔다. 전술상 가장 효율적인 빈 공간을 귀신같이 찾아내 채워주는 재능이 괜히 탄생한 게 아니다.

감독이 불러주지 않아도 벤치에 앉아 인내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기다리는 일, 이것도 재능에 속한다. 맨유에 새로운 선수가 영입될 때마다 박지성 위기설이 등장한다. 그때마다 박지성은 말했다. “맨유 같은 팀에서 경쟁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늘 있는 일이죠.” 박지성은 매 시즌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았다.

이청용은 재능을 타고난 선수다. 하지만 그에게도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도봉중을 중퇴하고 2004년 FC 서울에 입단한 뒤 2007년 팀의 주전으로 발돋움할 때까지 2군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이청용은 “프리미어리그에 와서 느꼈던 실력 차이보다 FC 서울에 입단해서 느낀 충격이 더 컸다”고 고백했다.

FC서울 2군에서의 시련이 그를 강하게 키웠다. 이청용은 볼턴 입단 직후 잠시 2군 경기에 나서며 적응 기간을 거쳤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이미 경험했던 일이었다. 이미 그에게는 이겨내는 습관이 몸에 밴 뒤였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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