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햇볕정책의 국제신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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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달 초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주최 '아시아의 미래' 라는 국제세미나에 참석하는 길에 일본의 언론인.학자.외무성 관리들과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주류라고 할 보수적 지식인들과 토론하면 할수록 우리 정부의 국제적 신뢰성이 흔들리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 내향 치중하다 고립 걱정

일본의 온건 지식인들은 한.일관계가 뒤뚱거릴까봐 염려했다. 그들은 교과서 문제는 덜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가장 관심을 쏟는 후쇼샤(扶桑社)의 우익 역사 교과서가 공식적으로 채택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국내외의 논쟁 덕분에 판매는 많이 될지 모르지만 교과서 채택률은 높아야 3%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더 걱정하는 것은 한.일 양국 정치의 '내향화(內向化)' 추세였다. 그들은 외교적 경험이 백지상태인 새 총리가 아시아 관계를 그르칠까 걱정하고 있었다.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다고 공언함으로써 중국과 한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입장을 위축시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국내의 정치적 지반이 탄탄하지 못한 총리가 그의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일반국민의 보수적 심정을 겨냥하는 '내향적' 정치적 행위가 외향적인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의 김대중(金大中)정부 역시 국내의 정치적 입지 축소와 저조한 인기의 만회를 위해 교과서 문제를 강력하게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염려하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가 우익 역사 교과서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서 와다 하루키 교수 같은 일본의 소수 좌파 지식인들과 연대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일본의 본류라고 할 온건 보수노선에 반감만 불러일으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본과의 관계회복은 대북 햇볕정책과 더불어 이 정부의 가장 큰 외교성과 중 하나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이후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는 일본의 보수 정치지도자들과 한국 군부정권의 핵심들, 또는 부패한 몇몇 막후 지도자들간의 유착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이런 부패하고 부정적인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양국의 온건한 중도보수적인 중심집단간의 교감과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한다.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은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 측면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과 같은 것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일본 지식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 평가들이 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상당한 비판을 무릅쓰고 대일관계를 서둘러 정상화시킨 것은 대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후배지(後背地) 강화 전술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북문제가 어느 정도 결실을 본 시점에 일본의 지원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비춰질까. 대북정책을 길고 넓게 내다본다면 미.일의 긴밀한 지원이 가장 긴요한 요소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훼손할 만한 보상을 아직 북에서 받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더군다나 북한이 미사일 문제를 가지고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려 장난질했다는 의구심과 한국 정부가 대북정책의 소강을 미국 신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는 데 대한 미국 정부의 강한 불쾌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일본도 한국 정부가 베를린 선언 이후의 대북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으로 인해 발생한 남북관계의 답보상황을 밖으로 떠넘기는 태도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답방지연 문제 왜 생겼나

자칫하면 정부는 대북정책의 가장 강한 후원자이어야 할 미.일 양측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과 일본의 정치가 점점 내향화 추세를 보이고 있는 지금 이 두 나라로부터의 신뢰상실은 뒤집어 보면 북한에 대한 김대중 지렛대의 효용성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재촉함으로써 그의 답방 지연이 마치 북쪽의 탓인 양 몰아가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수많은 장밋빛 약속과 이를 기초로 한 밀약을 지키지 못한 정부, 미국에 대해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북측마저 신뢰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앞으로 햇볕정책과 같은 대북 포용정책의 효용성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김영배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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