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워치] 거리 확인한 미국-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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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유럽 순방이 막을 내렸다. 부시 외교의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으로 예상됐던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방문지마다 "부시 고 홈" 을 외치는 시위대가 등장했고, 각국 지도자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같은 상황은 미국과 유럽 사이에 조성되고 있는 외교적 갈등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유럽엔 일찍이 볼 수 없던 반미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동서냉전이 끝난 후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유럽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미국이 역사.문화적으로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유대감, 과거 미국 지도자들의 친(親)유럽 성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대외정책은 민주당에 비해 고립주의 노선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부시 행정부의 유럽 무시는 도를 넘었다는 것이 유럽인들의 인식이다.

유럽인들은 부시 외교의 일방주의에 분개한다. 남이야 어찌 됐건 미국에 필요하면 한다는 일방주의는 오만한 미국 제일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교토(京都)의정서 탈퇴, 철강제품 수입 제한이 구체적 예다. 유럽도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국과 관계 개선, 신속대응군(RRF) 창설, 중동.한반도 문제 개입 등 유럽연합(EU)의 독자외교는 주목할 만하다. EU 의장국인 스웨덴의 예란 페르손 총리는 부시 방문을 앞두고 가진 연설에서 "EU가 미국의 세계 지배를 막는 견제 역할을 할 것" 이라고 다짐했다.

부시가 유럽을 순방한 일차적 목적은 유럽 동맹국과의 관계 수복이었다. 하지만 출발 전 MD체제 구축과 교토의정서 탈퇴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못박음으로써 유럽인들을 설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희박했다.

그런 점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대 연설에서 "역사상 평화.진보.인간의 존엄성을 지킨 위대한 힘이었던 미국과 유럽은 분리될 수 없으며 지금의 견해 차이는 사소한 것" 이라고 강조한 부시의 친(親)유럽 노선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국제정치학자들은 미국-유럽 갈등의 원인을 보다 근본적인 데서 찾는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MD체제.교토의정서를 미국은 '정책의 문제' 로 보는 데 반해 유럽은 '문명의 문제' 로 파악한다. 유럽은 미국이 지구 차원의 중대 사안을 국가 이기주의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이같은 시각 차이는 정권이 갖는 정치이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보수적인 공화당 정권과 달리 EU 15개 회원국 중 11개국은 중도좌파 정당이 집권하고 있다.

부시의 유럽 순방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한 프랑스 대학생이 꼬집은 대로 부시는 유럽이라는 또 다른 문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지 모른다. 미국과 유럽도 과거처럼 공통된 유산, 공통된 가치를 누리는 관계가 더 이상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정우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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