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선언 1년… 더 애타는 이산의 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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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늘도 무슨 소식 없소?"

14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별관 1층 이산가족센터를 찾은 전옥실(田玉實.73)할머니의 첫 마디. 중단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한다는 북쪽의 기별이 없었느냐는 물음이다.

적십자사 건물 뒤 골목길로 50m쯤 내려가 딸이 운영하는 피아노학원 간판이 붙은 집이 田할머니가 사는 곳이다.

지난해 6 .15남북정상회담 이후 매일 이 골목길을 걸어 적십자사를 찾은 지 꼭 1년. 적십자사 직원들은 그를 '피아노집 할머니' 라고 부른다.

田할머니는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 남편 표동국(1991년 작고)씨와 68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짐 챙겨 고향에 가자" 며 적십자사를 찾았던 게 어언 33년 전이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이산 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다.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때는 남편과 함께 매일 가족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여의도를 오갔다. 그 남편은 위암으로 먼저 저 세상에 갔다.

할머니는 고향인 평남 대동군 청룡군 회리에 1백세가 됐을 아버지 전원필씨와 어머니 신형옥씨, 언니 옥희, 동생 덕실.확실.복실.광수 중 누구든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날도 "다음 번엔 꼭 상봉단에 넣어달라" 고 신신당부하고 힘없이 돌아섰다.

또다른 적십자사 단골인 최봉한(崔鳳漢.91.경기도 부천시 중동)할아버지.

"북에 두고 온 딸애(최순단.67)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죽는 게 소원" 이라고 했다. 崔할아버지가 함북 성진(현재 김책시)에서 교원 생활을 하며 직접 가르쳐 월반으로 고교과정을 건너뛰고 김일성대 조선사학과에 입학했던 총명한 큰 딸이다. 하지만 6.25 때 인민군 행정요원으로 징집돼 '강원도 춘천까지 내려왔다' 고 편지를 보내온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 후 崔할아버지 역시 징집을 피해 단신 월남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14일 현재 11만6천6백59명의 상봉 신청자 중 80세 이상 노인은 2만3천명.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고령층이다.

적십자사 봉사원 조숙자(曺淑子.58)씨는 "매일 찾아 오시는 노인들께 '더 오래 사시라' 고 말할 때마다 죄스러운 심정" 이라고 했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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