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포스코·KT·한전 ‘빅3’를 모셔라…사활 건 유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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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력원자력의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30개 금융회사가 한수원 직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홍보에 나섰다. 지난 21일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인근 길거리에서 현수막을 들고 있는 신한금융투자 직원들. [신한금융투자 제공]

“5주 연속 주말도 없이 눈·비 맞으면서 발전소 앞을 지킨 효과죠.”

신한금융투자 김대홍 퇴직연금지원부장은 싱글벙글이었다. 24일 한국수력원자력이 선정한 퇴직연금사업자 10곳(보험 3, 은행 3, 증권 4) 안에 들었기 때문이다.

30개 금융회사가 겨룬 사업자 선정 경쟁은 불꽃이 튀었다. 한수원의 직원 선호도 조사에서 표를 따내기 위해 각 금융사가 울진·영광·월성·고리의 원자력발전소 앞으로 몰려왔다. 투표 기간이었던 20~23일엔 20여 개 금융회사가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나섰다. 선거 못지않은 열기였다.

직원 7800명, 퇴직금 규모 4200억원의 한수원은 올 상반기 퇴직연금 시장의 최고 ‘대어’였다. 이를 잡기 위해 고금리 경쟁도 치열했다. 연 7.95%를 제시한 신한금융투자를 비롯해 증권사가 7%대를 제시하자, 보험과 은행도 예금금리보다 2%포인트 이상 높은 6% 중반대를 내놨다. 사업자로 뽑히진 않았지만 무려 8.8%를 내건 증권사도 있었다.

이것도 그리 심한 경우는 아니다. 올해 퇴직연금 시장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올 하반기엔 퇴직금 규모만 1조원이 넘는 대기업들이 줄이어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전망이다. 이른바 빅3(KT·포스코·한국전력)의 등장이다. 세 기업만 합쳐도 예상되는 퇴직연금 규모가 4조~5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금융사들은 이들 대기업이 8~9월쯤이면 사업자 선정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보험회사 관계자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대기업들로부터 최근 컨설팅 요청이 들어오는 등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올해는 퇴직연금 시장의 ‘진검 승부’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기아차와 현대중공업도 올 하반기에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이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쌓아둔 퇴직금만 합쳐도 3조원에 육박한다. 다만 그룹 계열 증권사(HMC·하이투자증권)가 있는 터라 다른 금융사의 진입이 쉽지 않을 수 있다.

대기업·공기업은 퇴직금 규모도 크지만, 상징성이 있어 금융사들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이들이 한수원 사업자 선정에 목을 맨 것도 이 때문이다. 연말에 나올 큰 기업을 잡기 위해선 미리 시장을 선점해둘 필요도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를 뽑을 땐 과거 유치 실적이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한번 사업자로 뽑힌 경우, 장기간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금융회사들이 초기 비용을 감수하는 이유다. 우리은행 퇴직연금부 구재설 부부장은 “처음 사업자로 선정되면 기득권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에 각 금융사가 금리를 높게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시장은 2005년 말 제도가 도입될 때부터 경쟁이 뜨거웠다. 하지만 올해 말이 유독 관심을 끄는 건 제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동안 손비처리가 됐던 퇴직보험·신탁은 내년부터 신규 취급이 중단된다. 따라서 퇴직보험·신탁을 들었던 기업들이 연말부터는 퇴직연금으로 대거 갈아탈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이 거세지면서 은행·보험·증권 사이에 물고 물리는 공방이 이어진다. 5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는 은행에 대해 보험사는 ‘꺾기’ 의혹을 제기한다.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미끼로 퇴직연금 사업자 자리를 따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비해 은행은 보험사와 일부 증권사에 대한 대기업의 계열사 밀어주기를 문제 삼는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의 퇴직연금 사업자로 삼성생명이 단독 선정되면서 이런 비판은 더 커졌다. 삼성전자의 퇴직금 규모는 1조원이 넘는다. 또 보험사와 은행은 증권사들이 무리하게 높은 금리를 제시해 출혈경쟁을 조장하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가장 늦게 시장에 뛰어든 증권사들은 낮은 인지도와 부족한 영업망을 고금리란 무기로 만회하고 있는 상황이다.

분위기가 혼탁해지자 금융위원회는 이달부터 ‘퇴직연금 공정경쟁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책을 마련 중이다. 금융당국은 실제 운용수익률이 연 4~5%대인 상황에서 기업에 7~8%의 고금리를 보장하는 역마진은 문제라고 본다. 길게 보면 금융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해치거나 퇴직연금이 아닌 다른 소비자까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과당경쟁을 막는 제도적 방안을 4월 중에 발표하는 한편, 필요한 경우엔 금감원 검사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일단 사업자가 되면 계속 유지될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라고도 말했다. 지난해 한 공기업은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한 지 1년 만에 싹 바꿔버리기도 했다. 1년 만에 더 높은 금리를 주는 곳으로 갈아탄 것이다. ‘일단 잡고 보자’ 식의 출혈경쟁은 시장 분위기만 흩트릴 뿐이라는 지적이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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