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돼지 저금통의 동전이나 훑어가며 남긴 발자국에 묻어나는 그대/차라리 이 마음도 가져 가시지/밤손이여, 우리 우연처럼 만날 수는 없는가/만나면 내 다 내놓을 터이니. "

'마지막 재야인사' 백기완(白基玩.69)씨가 운영하는 서울 대학로의 통일문제연구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이 연구소의 허름한 대문에는 하필이면 가난한 연구소에 들어와 기껏 돼지저금통밖에 털어가지 못한 '불운한 밤손(도둑)' 을 위해 白씨가 쓴 글이 걸려 있다.

白씨가 밤손에게 이렇게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현재 白씨는 '노나메기' 라는 계간지를 간행하며 아직도 활발히 활동 중이지만 1999년에는 재정난으로 연구소 문을 닫고 실의에 빠졌던 순간이 있었다. 이때 그에게 힘을 준 것이 소매치기였다고 한다.

"97년부터 이상하게 강연요청도, 원고청탁도 뚝 끊어지더라고. 그런데 작년에 오랜만에 인천에서 강연요청이 와 강연을 하고 3만원을 받아 돌아오다가 지하철에서 친구를 만나 술을 한잔 했지. 돈을 내려고 보니 소매치기를 당한 거야. 그 며칠 뒤 67년에 발족해 군사정부 시절 내가 간판을 등에 메고 다니면서 지켜온 백범연구소를 32년 만에 폐쇄해야 했어.

천장에서 비가 뚝뚝 떨어지는 연구소에 앉아 한탄을 하고 있는데 우연히 신문지 밑에서 하얀 봉투를 발견했지. 거기엔 잃어버린 돈 3만원과 함께 '죄송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라는 글귀가 적혀있더라고. "

그는 '소매치기도 나에게 용기를 내라는데 그냥 주저앉을 순 없다' 며 다시 일어났다. 지난해 연구소 이름을 통일문제연구소로 바꿔 열었고, '노나메기' 첫 호를 발간했다.

노나메기란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살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정서이자 세계정신" 이라고 白씨는 설명했다.

다행히 철거민.노점상들이 적극적으로 잡지를 사줘 2호를 낼 수 있었고, 현재 5호를 준비 중이다.

시인 김정환, 가수 정태춘.전인권.이은미씨 등 지인들도 白씨를 돕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이들은 노나메기 정기구독자를 모으기 위해 오는 9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음악공연을 한다.

예의 빗질 한번 안 한 갈기머리에 이제는 이마에 훈장같은 주름까지 깊게 패어 있는 白씨는 젊은이들에게 '노나메기' 를 통해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호랑이는 허리가 삐어도 굴 속에 있으면 안돼. 벼랑으로 가 거기서 굴러야 허리가 펴져. 젊은 사람들이 좁은 굴 속에 안주하며 세상에 빌붙어 살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강민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