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저축은행, 공적자금 조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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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지막 날이다. 비 소식도 있고 바람도 차다. 흉노에 끌려간 왕소군의 심정을 기려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더라(春來不似春)’라고 읊었던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866C>)의 시구가 올해만큼 맞는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걸핏하면 영하권을 넘나드는 날씨는 물론이요 풀릴 기미 없는 정치권의 세종시 엄동설한부터 줄기만 하는 일자리까지 정치·사회·경제 어느 것 하나 봄의 훈풍과는 거리가 멀다. 왕소군은 ‘오랑캐땅(胡地)’이라 ‘화초가 피지 않는다’(無花草)고 원망했다지만 내 나라 내 강토라고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금융권도 비슷하다. 지난주 취임 2년을 맞은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의 소회도 춘래불사춘이었다. 그는 “지난 2년은 위기의 연속이었다”며 “아직 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뭐가 그리 금융감독당국 수장의 마음을 짓눌렀을까. 그중 하나는 저축은행일 것이다. 그날 그는 저축은행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특별검사반을 만들어 수시로 검사·감독하겠다, 지금까지는 검사를 제대로 못했다, 앞으론 갑자기 쓰러지는 곳이 없도록 하겠다 등등.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안 건너간다’고 소문난 김 원장이다. 그가 화들짝 놀라 나섰다는 건 그만큼 일이 급해졌다는 얘기다.

저축은행 부실 문제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5년 전부터 저축은행발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다. 문제가 뭔지, 해법이 뭔지 금융가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가장 큰 화근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다. 2000년대 초 부동산 버블 시절 건설·개발업체에 마구 빌려줬던 돈이 거품이 꺼지자 골칫거리로 바뀐 것이다(2003년 30조원이던 저축은행 자산은 6년 만인 지난해 말 82조원으로 늘었다. 이 중 PF 대출은 약 12조원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고 빨리 키운 덩치가 탈이 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5년 전부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처방전으로 제시됐지만 늘 미뤄졌다. 금융계 관계자는 “부실 청소는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는 일”이라며 “(감독 당국도) 가능한 한 후임에게 미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번엔 아예 정부가 나서 인공호흡기를 달아주기도 했다. 저축은행의 부실 PF 채권 1조7000억원어치를 사줬다.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이 기준을 밑돌아도 주의나 경고를 주지 않고 미뤘다. 그 바람에 부실을 두 배, 세 배 키우기도 했다.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곳도 나타났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전북 최대 전일저축은행이 딱 그 케이스다. 그러다 보니 업계 자체의 구조조정도 쉽지 않다. 부실기업에 투자하는 K투자회사의 Y사장은 “뻔히 부실이 보이는데, 웬걸 연말에 내놓는 숫자는 멀쩡한 저축은행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그는 “연체율을 낮추는 편법이 널리 퍼진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했다.

부실을 파헤친들 후속 수단도 막막하다. 구조조정에 쓸 실탄이 없어서다. 지금까지 망한 저축은행 고객에게 지급한 보험금만 7조원이 넘는다. 그 바람에 저축은행 몫의 예금보험기금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 5년이 넘었다. 예금보험기금은 금융회사가 망할 때를 대비해 쌓아놓는 돈이다. 저축은행이 은행 등에서 꿔다 쓴 기금만 지난해 말 현재 2조4405억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공적자금 조성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여야 합의를 끌어내기 어렵다. 반론도 많을 것이다. 적정 규모 산정도 논란거리다. 감독 당국도 소극적이다. 감독원 관계자는 “(감독 당국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순간, 진짜 문제가 된다”며 반대했다. 폴 크루그먼이 얘기한 이른바 ‘자기실현적 패닉’이 걱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를 알면서 마냥 미룰 수는 없다. 날씨야 하늘의 뜻이라지만 금융 시장의 춘풍은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마침 김종창 원장은 지난주 이런 말도 했다. 거안사위(居安思危).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이다. 평안할 때 위기를 대비하라.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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