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국내 건축계에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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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국내 건축계에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촉발된 것은 1982년 독립기념관 설계 공모를 통해서였다. 거대한 한옥지붕을 얹은 현재의 안(案)이 당선돼 모더니즘의 교의(敎義)에 충실했던 당시 건축계에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구 건축계의 동향에 민감한 국내 건축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 건축 이론의 기본서들이 들어와 있었지만, 실무 건축계에서 과감하게 '(과거 건축의 양식 등을 도입한)역사적 상징의 인용' 이라는 탈(脫)근대적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쉽지 않았다. 추상적 순수 형태를 고집했던 모더니즘의 눈으로 본다면, 기와지붕이라는 전통적 요소를 차용하는 행위는 시대착오적인 퇴행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 지식계와 문화계가 설정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진정한 근대화' 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80년대 건축계의 화두는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인가' 였다.

건축의 사회적.공공적 역할, 건축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으로서의 건축물, 편리함과 기능성을 보장하는 합리주의적 태도 등을 강조했던 학계와 건축계에서는 "아직 모더니즘도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포스트 모던은 무의미하다" 는 강한 비판이 주류를 이뤘다. '근대를 넘어서' 라는 의미의 탈근대란 근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정당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비록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독재적인 전체주의 사회였지만, 경제 구조는 근대적 성격을 지나 후기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문화계에서는 이미 가벼움과 일상적 쾌락이 주된 예술의 가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치적 전근대와 경제적 근대, 문화적 탈근대가 혼재해 있는 한국의 사회적 현상 자체가 포스트 모던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구적 의미의 근대-탈근대의 순차적인 전개가 역사 경험이 전혀 다른 한국에서는 오히려 불가능한 형식논리였다.

90년대 세계화 이데올로기는 건축계의 개방을 가속시켰고,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해체주의 건축이 소개돼 건축의 변화 폭을 확대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지식이 일천한 건축계는 해체주의 건축을 인식론적 차원이 아닌 형태적인 경향으로 수용했다.

주체의 죽음, 거대 서사의 허위성 폭로, 단선적 역사관의 부정 등 근원적인 세계관에 대한 논쟁은 나타나지 않고, 해체주의적 경향의 건축물들이 각종 설계 공모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건물 윤곽은 비틀리기 시작했고 철 파이프와 유리 등 이질적 재료들이 혼용되는, 이른바 '해체주의 양식' 의 건축이 유행하기도 했다.

탈근대적 인식이 상업주의와 결탁하면 싸구려 키치로 전락해 도시와 건축의 환경을 훼손하게 된다.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중심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탈근대적 사유는 지역주의 건축을 가능케 한다. 국내 의식있는 건축가들이 추구하는 한국성(性) 재해석 작업, 일상 속의 잠재력 재발견 노력 등은 휘청거리는 현실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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