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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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5. 다비식

1993년 11월 10일, 40년간 누더기만 입었던 성철스님이 노란 국화꽃으로 뒤덮인 법구차(法軀車.스님의 시신을 옮기는 운구차)에 누웠다. 신도들이 지어온 장삼을 물리칠 때마다 "나는 좋은 옷 입을 자격 없데이" 라고 하시던 스님이 이날만은 세상에서 제일 화사한 국화옷을 입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빗발이 가늘어지더니 뜸해진다. 다비장은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절에서 3㎞ 정도 떨어진 산중, 예전부터 다비식이 열리던 빈터다. 인로왕번(引路王幡.운구행렬을 이끄는 깃발)을 따라 스님의 명정이 앞서고 1천여 개가 넘는 만장이 뒤따랐다.

이어 향로.영정.위패가 나서고, 그 뒤를 상여차와 문도스님 이하 스님들과 신도들이 대오를 지어 따랐다. 절을 내려오는데, 운집한 신도들이 하나같이 오열하는 것 아닌가. 3㎞의 산길을 가득 메우고도 남아 나무등걸 위에까지 애도 인파가 가득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장례행렬이 길을 헤쳐가야 했다.

일부러 기존 다비장터 주변의 잡목을 정리해 넓혀 놓았는데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주변 언덕, 나무 사이사이까지 사람들로 가득해 말 그대로 사람의 산이고 바다였다. 다비장 한가운데 연화대(蓮花臺)는 거대한 연꽃 봉우리로 장엄했다.

비구니 스님들이 열과 성을 다해 연꽃 모양의 종이조각으로 연화대를 장식해 놓았다. 법구를 연화대의 거푸집에 밀어넣고, 성철스님의 상좌 중 맏이인 천제스님과 내가 마지막으로 장작을 집어 거푸집 입구를 막았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구나. "

순간 미혹한 생각이 들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절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염불이 끝나고 종단의 대표 스님들과 문도 대표 스님들이 솜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이어 "거화(擧火)" 라는 구령에 맞춰 일제히 연화대에 불을 지폈다. 거의 동시에 다비를 지켜보던 스님들이 외쳤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

목이 터져라 세 번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스님을 보내는 대중들의 관행적인 외침이다. 참았던 눈물이 또 주르르 흘렀다. 불길은 하늘로 치솟고 운집한 수많은 대중들도 누구랄 것 없이 함께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면서 불길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 탈 없이 돌아가셔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이 들었다. 불길은 밤을 새워 타오를 것이다. 다비장 바깥 사정이 궁금했다.

절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 관계자를 만났더니 일대가 온통 난리란다. 해인사 경내와 다비장, 그 사이 3㎞의 산길을 메운 인파만 10만여명. 대구에서 해인사로 들어오는 88고속도로 고령 IC에서부터 해인사 IC까지 버스들이 꽉 들어차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고 한다.

버스를 버리고 걸어오는 인파까지 합하면 모두 30여만이나 되는 인파가 다비장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성철스님은 평생 "산승은 산에 머물러야 한다" 며 세상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 그 스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해인사 창건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몰리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다비장으로 돌아오니 수천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여전히 다비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불길에 휩싸여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드신 스님의 법구를 향해 열심히 염불하고 있었다. 거화하고 다비식 법요를 마치면 문도들만 남고 나머지는 다들 흩어지는 것이 상례인 다비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신도들이 다비장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은 더더욱 뜻밖이었다.

다비장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스님의 육성은 귀에 쟁쟁한데, 이제 얼마 후면 스님도 한줌의 재로 돌아간다" 고 생각하니 한동안 잊었던 눈물이 또 다시 밀려왔다. 살아계신 동안 왜 좀더 잘 모시지 못했을까….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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