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낚시] '파인딩 포레스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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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음악에도 있고 미술에도 있고 체육에도, 그리고 무용에도 있으나 문학에만 없는 게 있다. 바로 신동이다. 그래도 시 쪽에는 랭보 같은 경우가 있으니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소설 쪽에선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서양문학사의 고전들,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같은 작품은 10대가 쓸 수 있는 성질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과 회한의 쓴 잔을 마셔본 자들의 전유물이다. 제 아무리 경천동지할 천재라도 도저히 안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영역이다. 그러니 소설을 일컬어 황혼의 양식이라 부르는 건 빈말이 아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문학양식이다.

소설뿐 아니라 산문의 모든 장르는 신동이라는 괴물들과 별로 친숙하지 않다. 소설보다는 쉬워 보여 만만하게들 생각하는 에세이의 세계에도 신동 작가라 불릴 만한 천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에세이라도 거기에는 분명 세상을 보는 폭넓은 안목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지혜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산문을 쓰는 자에게 필요한 건 천재적 감수성과 탁월한 문장력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고 유연한 이해력인데, 불행히도 이것은 세월이 우리의 젊음을 앗아가는 대가로 지불하는 덕목이다.

그렇지만 대중들이 천재를 기다리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성립한 이 '천재' 라는 유형의 인간들은 이전의 영웅(기사 혹은 성자)을 대체한 새로운 형태의 영웅이었다. 대중들은 천재에 열광하고 천재를 소비한다. 천재를 저주하고 천재를 갈망하고 천재를 살해한다. 자본주의는 이 천재를 팔아먹는 데 탁월하게 효율적인 시스템이어서 음반사와 출판사와 화상들은 끊임없이 문제적인 천재를 찾아 헤맨다. 신동이라면 금상첨화. 물론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천재만큼 영화와 어울리는 존재도 드물다.

그들은 화려하며 남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물론 이것은 천재의 참모습이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파인딩 포레스터' 는 이 낡은 천재신화에 안이하게 기대고 있다. '파인딩 포레스터' 에 문학적 천재로 등장하는 흑인 소년의 캐릭터는, 그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열여섯이라는 나이, 즉 너무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허황해 보인다. 단 한 권의 걸작을 남기고 수십 년을 은둔한다는 포레스터라는 노작가 캐릭터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숀 코너리의 무게감은 여전하나 영화를 구원할 정도는 아니다. '파인딩 포레스터' 는 문학을 고작 작가맞추기 식의 퀴즈문답이나 백일장 정도로 본다. 그렇게 보는 거야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마음이겠으나 그걸 통해 흑백, 그리고 노소의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건 어쩐지 썰렁한 농담으로 들린다. 대신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

김영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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