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대북 강경론 보다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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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이 그들 해군에 굴욕적인 참패를 안긴 2년 전 연평도 근해의 무력충돌을 잊었을 리 없다. 그때의 충돌은 북한이 정전협정과 직접 관련된 북방한계선(NLL)을 무효로 하고 해상분계선을 다시 긋자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그런 북한이 이번에는 상선들을 제주해협까지 내려보내 남한 영해와 북방한계선을 유린하고 북으로 돌아갔다. 황야의 무법자들이 작은 도시에 들어와 한바탕 분탕질을 치고 모래바람을 일으키면서 노을 진 지평선 너머로 유유히 사라지는 미국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한가지 공통점은 서부영화의 보안관과 제주해협의 한국 해군이 무법자의 난동과 북한 상선의 영해 침범을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은 서부의 보안관은 세(勢)부족으로 갱단에 대항할 엄두를 못냈지만 한국 해군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힘의 사용을 자제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 정부의 조치다. 정부는 해군의 수수방관을 적절한 조치로 인정하고, 평양이 회심의 침묵을 지키는 사이 북한 상선들의 한국 영해 침범행위를 서둘러 추인(追認)하고 앞으로 제주해협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시라" 는 의미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북한은 확신을 갖고 남한의 영해를 침범했다. 한국 해군이 2년 전 서해에서와 같이 힘으로 북한 선박의 진로를 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랬다. 정부는 행여 북한의 비위를 건드려 6.15 공동선언이라는 소중한 유리그릇이 깨질세라 조심조심 이 괴상한 사태에 접근했다.

남북화해도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 진행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너무 써먹어서 의미가 탈색돼 버렸다. 북한 상선들의 영해침범은 그런 관념적인 구호 이상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강창성(姜昌成.한나라당)의원이 옳은 지적을 했다. 쌀을 실은 민간선박이라고 통과시키면 북한의 민간항공기가 서울상공을 침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의 성급한 조치로 남북한이 발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신뢰구축을 위한 중요한 합의 하나를 추가시킬 호재(好材)를 놓친 게 애석하다. 정부는 북한이 원하는 남한 영해의 무해통항(無害通航)은 협상의 대상이 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왔다. 동해안과 서해안 사이에 물동량이 많은 북한에 제주해협을 통한 항로단축에서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이익을 얻는다.

북방한계선은 별개의 문제다. 북한의 의도부터 다르다. 북한은 북방한계선의 변경을 통해서 정전협정을 흔들려고 한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지난 1년 동안 도발을 자제했을 뿐이다. 따라서 영해와 북방한계선의 분리처리는 옳다.

정부는 북한 선박들이 제주해협을 침범한 뒤 바로 제주해협과 북방한계선 일대에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북한 선박들을 정지시킬수 있는 규모의 해군 함정을 보내는 한편 북한에 엄중 항의하고 문제를 제기해 대화로 유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순서를 거꾸로 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북한의 의도적인 도발을 재빨리 양해하고 앞으로 제주해협을 통과하고 싶으면 사전에 요청하면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북한을 크게 고무했을 것이다. 북한이 고무된다고 배 아플 건 없지만 북한은 동해의 군사경계수역과 2백해리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은 고스란히 지키면서 남한 영해의 통항권을 확보하게 됐으니 우리가 협상카드를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비판도 무리가 아니다.

북한 선박들은 남한 영해에 나타난 것과 똑 같이 갑작스럽게 공해로 나갔다. 그들이 언제 다시 나타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모른다. 오는 것도 마음대로, 가는 것도 마음대로다. 정치권과 일부 여론이 요구한 강경대응이 건설적인 대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북한의 돌출행동은 윤곽이 드러나지 않은 미국의 대북정책과, 그것이 남한의 대북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불안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해 침범 같은 개별사건의 처리도 햇볕정책의 전체적인 틀을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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