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부왕 살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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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프리카 실루크족 전통에 따르면 왕자는 누구나 왕과 싸워 왕을 죽이면 즉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줄루족도 왕이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이 생기면 왕을 처형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19세기 초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국을 세웠던 샤카왕도 흰 머리카락이 생기지 않는 머릿기름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저가 세계 광범위한 지역의 풍속을 정리.분석해 놓아 현대 정신분석학.종교학.철학.문학 등에 광범한 영향을 끼친 『황금 가지』에 따르면 아버지 왕을 살해하는 풍속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왕은 우주 에너지의 중심이므로 그가 병들거나 노쇠의 징후를 보이면 곧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곡식이 결실치 않고 가축이 떼죽음을 당한다고 믿어 그 전에 살해, 후계자에게 그 건강한 영혼과 힘을 옮겨주기 위해서라고 프레이저는 풀이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도 자신의 아버지 크노소스를 죽이고 신의 왕이 됐다. 크노소스 역시 아버지 우라누스를 죽이고 자신도 그 처지가 될까봐 자식들을 잡아먹다 제우스에게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술적.신화적인 아버지 왕 살해 풍속은 고대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 에 와 윤리적.심리적 차원으로 들어온다. 모르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자책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빼버리고 방황한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를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심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로 부르고 있다.

우리 역사에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예는 보이지만 왕자가 아버지를 살해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민간에서도 부자지간의 천륜을 저버리면 즉시 능지처참할 정도로 엄했다.

지난 1일 네팔 궁정에서 세자가 왕과 왕비를 비롯해 8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 세상을 경악케 하고 있다. 궁정 만찬 석상에서 총을 난사해 함께 있던 왕족을 몰살하고 자살했다니 자신의 젊고 신선한 피로 왕국을 다시 건강하게 세우겠다는, 왕권에 대한 주술적 차원에서의 도전은 아닌 것 같다. 11대 왕의 참극을 예언했다는 2백30년 전의 전설이나 부왕을 살해한 왕세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킨 네팔 왕국의 조처에 대해서나 세계인들이 이해하기는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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