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경쟁력이다] 남해 다랑이 마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경남 남해군의 최남단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 마을 좌우 45도 경사의 비탈에 층층이 계단처럼 만들어진 논인 '다랑이'들이 산굽이를 돌고 있다. 10평 정도에서부터 300평이 넘는 논 등 500여개가 마치 지도에 표시된 등고선을 연상케 한다. 추수가 끝났지만 황량한 느낌은 없다. 오히려 꾸불꾸불한 논두렁의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푸근함을 안겨준다.

바닷가 산골마을인 '가천 다랑이 마을'이 옛 농촌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덕에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면서 향수를 느끼려는 도시민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다랑이를 활용해 농촌 전통 테마마을을 운영, 짭짤한 소득도 올리고 있다.


▶ 추수가 막 끝난 경남 남해군 남면 가천마을의 계단식 논. 수백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덕에 관광지로 뜨고 있다. 송봉근 기자

◆ 보존이 경쟁력=넘실대는 남해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다랑이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데는 이곳 주민들의 억척스러움과 고단함이 배어 있다.

400여년 전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설흘산(420m)이 바다로 흘러내린 가파른 비탈에 돌을 쌓아 논과 밭을 만들었다. 경작지를 한 뼘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석축을 쌓기도 했다. 바위투성이 논 바닥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흙을 돋우느라 손이 부르텄다. 코앞에 바다가 있지만 깊고 파도가 높아 어업은 엄두를 못 내고 농사가 아니면 먹고살 수 없었다.

농촌에 기계화 바람이 거세게 불 때도 소가 쟁기질을 했고, 지게로 거름을 내고 나락을 날랐다. 부족한 물이 새나가지 않도록 논을 깊게 해 두렁을 두툼하고 조밀하게 만들었다. 바둑판 모양의 경지정리가 전국적으로 유행할 때도 이곳 논은 엄두를 못 냈다.

위 아래로 높낮이가 심해 도저히 정리가 안 됐기 때문이다. 등이 휘도록 일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자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생계 터전인 다랑이를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 왔다. 그 결과 고난의 상징인 다랑이가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변했다.

35년간 도시 생활을 끝내고 지난 5월 고향에 정착한 김학봉(59)씨는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옛모습을 잘 보존해온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추억을 팔아요="계단식 논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정겨워요. 마을이 고향처럼 푸근해서 좋아요." 남편과 함께 가천마을을 찾은 이정희(46.여.서울)씨는 "다음엔 꼭 애들을 데리고 와야겠다"며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마을사람들은 "동네가 사람의 자궁과 같은 산세에 자리잡아 포근하다. 남향이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자랑한다.

장수마을로 소문난 마을 어귀에서 늦가을 오후 햇볕을 쬐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평화롭다. 추수가 끝난 논엔 지역 특산품 마늘이 푸른잎을 뽐내고, 배추와 무도 싱그럽다. 동네 감나무엔 따다 남은 감이 듬성듬성 달려 있고, 지붕에 올려진 광주리 속의 곶감은 따사한 햇볕에 윤기가 흘렀다. 집집마다 마루나 대청마루 밑, 담장 위에 놓인 잘 익은 호박이 소담스럽다.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선영규(35.충남 천안시)씨는 "마을 집집마다 저녁밥을 짓느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어릴 적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주민 김표형(67)씨는 "마을을 찾는 시골 출신들은 향수를 느끼고, 도시 사람들은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 늘어나는 관광객=산.논.바다가 어우러진 이 마을을 농촌진흥청은 2002년 농촌 전통 테마마을로 지정했다. 주민들은 농촌진흥청의 테마마을 세가지 체험 프로그램에 20여가지를 추가로 개발, 사계절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바다와 가까운 다랑이에는 유채꽃을 심어 봄이면 사진 애호가들이 유채꽃을 찍으려고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설흘산 등산을 겸한 관광객들도 주말이면 1000명 이상이 찾아오며, 체험 프로그램을 배우러 오는 단체도 많다. 2002년 5000명 정도이던 관광객이 2003년 1만3000명으로 늘었고 올 10월까지 1만8000명을 넘었다. 올해 해맞이 행사엔 6000명이 모여 작은 마을 전체가 사람으로 넘쳐났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민박집(13곳)마다 연간 50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민박집 수입금의 10%는 마을 기금으로 쓴다. 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마늘.고구마 등 농산물과 해삼.전복 등 수산물도 판매하고 있다. 농산물 판매는 마을 158가구 대부분이 참여한다.

권정도(57)이장은 "제주도만큼 따뜻하고 물이 맑아 살기 좋고, 농사도 잘 된다. 밤과 낮 기온 차가 커 과일과 채소의 맛이 좋다"며 "이웃 마을이 10리나 떨어져 있어 동네 사람이 형제처럼 지내 범죄가 없고, 도박이 없다"고 자랑했다.

남해=강진권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