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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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용성(朴容晟)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이달로 취임 1주년을 맞아 중앙일보에 특별 기고문을 보내왔다. 국내 최대 경제단체의 장이면서 OB맥주 회장을 겸하고 있는 朴회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두산그룹의 구조조정을 직접 지휘한 바 있다.

구조조정이란 말은 외환위기 이후 좋든 싫든 기업.은행.정부만 아니라 대학.가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에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우리 경제의 해결사처럼 비쳐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경제가 어렵고 미래도 불확실해지면서 구조조정의 약효는 점차 떨어지고 있다. 근래엔 개혁피로증 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사실 구조조정이란 말의 퇴색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에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본으로 돌아가 구조조정의 참뜻을 다시 살필 때가 됐다.

구조조정 하면 으레 인원 감축.감량.사업 매각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본질은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업 주식의 시가총액을 늘려야 한다. 미국의 다우존스 지수는 지난 20년간 몇배 올랐는데 우리의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몇년간 떨어졌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우리 경제가 어려워진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시장가치를 높이는 일은 구조조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회사의 존립 근거인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그저 '남이 하니까' '**그룹이라는 간판을 달았는데' 하는 체면치레로 너나 없이 많은 사업을 벌였다가 속빈 강정 신세가 돼 버린 일이 어디 한둘인가.

진정한 구조조정은 냉엄한 현실인식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에겐 하키 채 모양처럼 내리막은 잠시고 오르막은 마냥 지속될 것처럼 앞날을 낙관하는 버릇이 있다. '내년이면 나아지겠지' 하는 식이다. 그러나 제비가 해마다 박씨를 물어다 주는 일은 결코 없다. 최대한 비관적인 자세로 임해야 성공적 구조조정에 좀더 가까와질 수 있다.

두산은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덕을 톡톡히 봤다. 통상 이들은 수억원을 받고 열쪽 안팎의 보고서를 가져다 주는게 고작이었지만 그 훈수는 두산의 운명을 좌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외부 컨설팅을 받을 때 전쟁의 전략에 관한 훈수를 기대해야지 전투교본까지 받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두산이 컨설팅회사에서 받은 첫번째 훈수는 '현금흐름이 왕' 이라는 것이었다. 가령 시장점유율 확대와 매출채권 회수 중에 택일하라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어느 환경에서도 수익과 성장을 보장하는 핵심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역량이 없는 사업은 그 분야에 핵심역량을 갖춘 곳에 제 값을 받고 팔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물론 구조조정은 기업의 노력만 갖고 되는 노릇이 아니다. 정부정책과 사회분위기가 받쳐 줘야 한다.

구조조정에 반드시 수반하는 외자유치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국내 알짜기업을 팔면 헐값 매각을 걱정하는 국부유출론.외국음모설 등에 시달리기 일쑤다. 국내총생산(GDP)의 외국인 직접투자 비중은 6%로 싱가포르(85%).중국(27%).영국(23%)등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인데도 말이다.

외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자랑스럽고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은 왜 그리 미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노사문제도 구조조정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이다.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이 12% 정도라는데, 이들의 주장을 따르다보면 생산.고용이 줄어 나머지 88%의 근로자가 희생될 수도 있다. 고용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정책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경제단체장을 맡으니까 각종 이벤트에 '얼굴마담' 이 되는 일이 잦다. 웬 행사가 그리 많은지 축사하고, 건배 제의하고, 테이프 커팅하느라 얼굴 내미는 일이 여간 만만치 않은 게 아니다. 혹시 우리의 구조조정도 이처럼 의례적이고 무늬만 그럴듯한 이벤트성 요소가 없는지 잘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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