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선거, 인기투표에 가까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시민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필리핀의 국민적 배우였다.

날렵한 액션으로 악당들을 무찌르던 '정의의 사도' 로서의 이미지는 스크린 밖 정치무대로 그대로 옮겨져 압도적 표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지난 14일 실시돼 막바지 개표가 진행 중인 필리핀 상원 중간선거에서도 또 한명의 '정의의 사도' 가 나타났다.

50%를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는 놀리 데 카스트로 후보가 그 주인공이다. 에스트라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14년간 TV방송에서 매일 저녁 뉴스를 전해온 앵커출신의 엘리트란 점이다.

카스트로는 에스트라다의 부패를 파헤치는 뉴스를 전하고 탄핵재판을 생중계하면서 자연스레 '정의의 사도' 로서의 이미지를 물려받았다.

카스트로뿐 아니라 다른 방송 진행자 두세 명이 더 상원에 진출할 전망이다.

이같은 방송 진행자들의 선전은 필리핀의 독특한 투표방식에 힘 입은 바 크다. 필리핀 상원의원은 지역구별로 뽑는 것이 아니라 전국구로 선출된다.

상원 정원 24석 가운데 13석을 뽑는 이번 중간선거 출마자는 모두 37명. 유권자들은 후보 37명의 이름 가운데 13명을 골라 직접 자필로 투표용지에 기재해야 한다.

그러니 지역에 뿌리를 내린 정치인 보다는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필리핀은 7천여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어 전국을 돌며 유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TV에 매일같이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방송진행자나 인기 연예인이 대거 당선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원 24명의 필리핀 상원의원 가운데에는 방송 진행자 출신, 연예인 출신, 농구선수 출신이 각 2명씩 모두 6명이 당선됐다.

필리핀의 상원 선거는 정책을 놓고 심판을 받는 정치의 장이라기보다 인기투표에 가깝다.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비교적 빨리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정당정치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정국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선거제도의 결함에도 그 원인이 있다.

예영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