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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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슬라보이 지젝을 중심으로 하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 는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메타심리학적 차원, 특히 정신분석학의 철학적 근거와 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수행한다.

메타심리학적 차원에서 정신분석학이란 단순한 치료 기술로서의 정신분석학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문제를 제기한 학문이다.

예컨대 신경증의 원인과 결과(신경증)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인과관계의 본질, 정상과 비정상의 정의, 치료 혹은 분석의 목표, 정신분석학과 타학문(심리학.정신의학.철학.예술 등)의 관계, 신경증의 원인인 억압에서 가족과 사회의 역할 등의 탐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메타(meta)라 한다.

여기에서의 정신분석학은 여타의 '심리치료' 를 위한 학문과 같이 단순히 기술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통제적 혹은 교육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 의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통찰하고 연구할 것을 요청한다.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창시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구사회주의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며 철학자다. 이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그룹은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 로 불린다.

구사회주의 지역 출신답게 지젝은,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년)에서 잘 드러났듯이 '우파와 좌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를 비판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지젝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알튀세르의 사상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적 관심이 단순히 좁은 의미의 사회심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자신의 연구영역을 영화와 대중문화.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라캉론을 전개했다. 지젝의 학문적 성과 중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라캉 정신분석학을 헤겔 철학과 연결시켜 해석한 것이다.

이 점에서도 지젝은 변증법 전통을 중시하는 프로이트.라캉적 사고에 충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심리적 과정' 은 자연과학적.의학적인 단선적(單線的) 사고에서가 아니라 헤겔 논리학에서 제시된 변증법적 차원을 통해서만 설득력있게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핵심적 주장 중 하나다.

라캉 정신분석학을 독일 관념론 철학.영화.대중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한 지젝의 학문적 업적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영.미권은 물론 유럽학계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젊은층들 사이에서 지젝은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정열로 인해 '컬트 인물' 로도 통하고 있다.

지젝은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상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돌라르.리나.보스비치.주판치치.살레클 등과 같은 류블랴나대 및 사회과학연구소의 동료.제자들로 구성된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를 주도하고 있다. 독일의 아헨대 초빙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의 '라캉과 현대정신분석학회' 는 올해 라캉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를 초빙해 강연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홍준기 <경희대 강사 . 정신분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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