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공지영 기고] 성다른 내 두아이 상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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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는 내 아들이 어린애일 때 재혼했다. 하지만 법률상 지금의 아빠와 아이는 그저 동거인 관계일 뿐이다.

아이는 아빠 직장의 의료보험 혜택도 못받고 세금공제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혹시 아빠와 성이 다르다는 걸 아이가 알게 될까봐 병원에서는 통사정을 해서 아이의 성을 빼고 부르게 했으며,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통장 하나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게 모든 것을 속여 왔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유치원 동창이 전혀 없는 멀고 낯선 학교에 낯선 본래의 이름으로 입학시켰다.

성이 바뀌었다는 놀림만이라도 피하게 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리고 먼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통학시키기 위해 나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집안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혼할 때 아이의 양육자이자 친권자로 법원에서 승인받았지만 아이의 여권 하나 만드는 일에도 호주인 전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것이 법이 보장하는 양육권과 친권의 현실이다.

지금 이 아이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성이 다른 동생에게 이를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이 아이들이 자라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방황하며 제 친부모를 원망하고 비뚤어질 무렵, 청소년 문제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친구는 이민을 준비 중이다.

이혼한 여성들은 호주제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편견 및 시선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전쟁터 같은 가정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이혼을 감행했다.

그렇다. 나는 이혼을 했고, 아이를 맡을 생각이 없는 친부 대신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평생 정절(?

)을 지키며 자숙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방법이 없음을 알고 공문서를 위조해 아이의 출생신고를 다시 해볼까도 생각했다. 감옥에 갇힌다 해도 해결만 된다면, 아니 아이가 진실을 이해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상처를 유보해 줄 수만 있다면…. 이것이 죄라면 나를 감옥에 보내라.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 이미 이웃의 시선에 주눅 든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덧입히지 말라.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와 그 엄마를 기꺼이 부양하는 착한 새아빠들에게도 더는 고통을 주지 말라.

우리는 충분히 괴롭다. 호주제를 지지하는 어른들이냐, 자라나는 아이들이냐의 갈림길에 우리는 서있다. 이것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혹시 내 아이가 다시 상처 입을 각오를 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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