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보수의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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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 전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주동이 돼 록펠러 가문, 금융투자가 소로스 등 미국 부자 1백20명이 부시 정부의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는 신문광고와 함께 의회청원을 낸 일이 있다.

*** 체제 지키려는 美기업인

미국의 상속세는 대략 1백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상속할 때 부과되며 세율도 55%에 달한다. 그런 부자들이 정부가 봐 주겠다는데도 굳이 세금을 내겠다고 우기는 것이다. 절세니 탈세니 하며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우리 기업인들의 풍토와 비교할 때 왜 미국 기업인들은 이런 곰바우 같은 짓을 할까.

미국의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창의력을 바탕으로 기회에 도전하고 노력을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체제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상속세라는 제도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이라 하여 아버지를 따라 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없듯이 부(富)가 절제없이 세습될 경우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인 기회와 경쟁은 없어지고 결국 미국은 쇠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 내 재산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더라도 이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 경제연구소 원장이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는 화두를 던진 일이 있다.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체제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을 보수(保守)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절, 어느 나라건 보수라는 것은 자신의 체제를 지켜가자는 쪽이기 때문이다. 구 소련시절 공산주의의 유지를 주장하는 쪽은 보수세력이고 이를 타파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가자는 쪽은 개혁세력이었다.

지금 우리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므로 이를 지켜가자는 쪽이 보수세력인 것이다. 우리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보수세력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데 깨기만 하면 저절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체제는 지켜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잠잠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갈등은 더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잠을 깬 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의 미국 기업인들의 자세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인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그저 모으고 쌓고 덩치를 키우는 일에만 급급해 아무 가책없이 위법.탈법을 기회만 있으면 저지르지는 않았는가. 그런 약점 때문에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매를 맞으면서도 "정권은 유한하나 재벌은 영원하다" 며 잠시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는 잠시 한 정권으로부터 매를 맞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그런 비윤리성이 빌미가 돼 결국 자본주의 근간이 침해받는 일이 벌어져도 업보 때문에 말을 못하는 지경까지 온 것은 아닐까.

종교 역시 보수의 핵심이다. 사람의 힘으로, 계획으로, 세상사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이 진보의 논리라고 한다면 종교는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는데서 나오는 겸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 겸손이 보수주의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 책임과 희생 감수했으면

그러나 우리 종교인들이 과연 그런 겸손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종교인 중에 가장 성공했다는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이제는 교회까지도 자식에게 대물림해 주겠다는 욕심에 차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런 종교인들이 판을 치는 나라에서 과연 보수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다. 보수주의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 온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언론이라는 도구를 남용해 흠잡힐 일을 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정부가 벌이는 언론개혁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흠집을 꼬투리 잡아 자유언론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인들도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윤리적으로 흠을 잡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보수세력이 진정으로 나라 장래를 걱정한다면 이제부터는 윤리를 회복한 보수주의를 주창해야 한다. 내 자유, 내 인권, 내 재산을 몽땅 잃지 않으려면 합당한 사회적 책임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그러한 윤리를 지키는 데서 유지 발전되는 것이다.

문창극 <미주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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