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7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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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72. ADB근무 5년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로 부임하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가 "하와이라도 가겠느냐" 며 하와이대 이스트웨스트센터에 객원연구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을 두고 아내와 둘이 떠난 나는 하와이에서 단꿈에 젖었다. 실로 십여년 만의 긴 휴식이었다.

석달 후 나는 하와이에서 ADB 본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로 곧장 날아갔다.

서울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자 남 전 총리가 "그 때 현명하게 판단 잘했다" 는 편지를 보내 왔다.

비록 개인 자격이기는 했지만 내가 ADB 부총재로 가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무역수지 흑자국이 됐기 때문이었다.

내가 재무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을 때 우리나라 수출입은행이 일본 수출입은행으로부터 5천만 달러의 융자를 들여온 일이 있다. 당시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으로 있던 후지오카(전 ADB 총재)가 이 융자건을 주선했다.

그 때 일본측은 9%가 넘는 가산금리를 적용했다. 그 후 금리가 떨어졌지만 우리는 이 돈을 앞당겨 갚지 않았다. 만기를 지키는 것도 신용이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후지오카는 훗날 자신이 쓴 책에서 다루었다. 우리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날짜를 지킨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그가 나를 ADB 부총재로 초빙한 배경이 됐다.

부총재 임기가 끝나가자 태국에서 이 자리를 넘겨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아직은 우리나라 출신 인사가 부총재를 맡고 있지만 언젠가 이 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본다. 외환보유고가 1천6백억 달러가 넘는 중국으로선 10억 달러를 꾸어 쓰느니 ADB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총재 자리는 물론 돈을 가장 많이 낸 일본의 몫이다.

내가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돈 꾸는 일에 종사했다면 ADB에 가서 내가 한 일은 돈을 꿔 주는 것이었다. 돈을 꿔 주는 사람들은 콧대가 높게 마련이다. 돈 꾸는 쪽에 앉아 있다 꿔 주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꾸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ADB 부총재로 부임하고 난 이듬해인 1989년 우리나라는 ADB를 졸업했다. 내가 우리 정부에 건의해 ADB의 차입국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되면서 다시 ADB도 불러들이고 말았지만.

93년 7월 31일 ADB 부총재의 5년 임기가 끝나는 날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출국 전 구독했던 신문을 다시 보기 위해 다음날 동네 보급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신문을 넣어달라고 했다. 보급소장이 "언제 돌아오셨느냐" 며 아는 체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이 신문은 나의 귀국을 특종이라도 되는 양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그 보급소장이 제보를 한 모양이었다. 이 기사는 나에 대해 "정씨는 외국에 나가 있던 5년 동안 단 한 번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로 취임할 당시 일본 재무차관 출신이 총재를 맡고 있어 격에 안 맞는 도피성 출국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고 언급했다.

ADB의 후지오카 총재는 일본 대장성 국장 출신이었지만 과장 이상의 보직은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전직 고관들이 맡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의 부총리를 지낸 나의 부임으로 ADB의 위신이 높아졌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아시아 유일의 차관 공여국이었던 일본의 경우 국장이 사실상 직업 공무원으로서 최고위직이었다. 반면 개도국 출신의 ADB 간부들 중엔 자기 나라에서는 직업 공무원으로서 최고위직인 사무차관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도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ADB 간부들 중 전직으로 치면 내가 가장 높았지만, 이미 적은 대로 막상 가 보니 부장은 물론 차장급 중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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