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황병기와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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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온고지신(溫故知新) 국악' 의 선구자 황병기(65.이화여대 한국음악과.사진)교수. 정악(正樂)과 산조(散調)를 모두 배우고 작곡과 연주도 병행한 그는 국악계의 보석같은 존재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꼽히는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근대화의 격랑에 휩싸여 자신의 몸짓을 잃고 방황하던 국악계에 새 언어와 풍류의 가능성을 심어놓았다.

수양의 방법으로 음악을 생활화했던 옛 선비들의 풍류와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는 민속음악 산조를 한 몸에 체화한 그의 국악인생 반세기엔 국악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이 모두 녹아 있는 것이다.

황교수가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한바탕 판소리처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신간은 그의 제자이기도 한 재미 작곡가 나효신씨가 묻고 황교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국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책이다. 한국 독자뿐만 아니라 세계에 소개할 작심으로 한글과 영문을 함께 실었다. 세계음악계에서 중국과 일본의 아류로 오해돼온 한국 음악을 제대로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는 뜻은 오히려 만시지탄이다.

황교수는 가야금을 처음 접한 중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6.25전쟁의 와중에 부산에 피란을 갔던 시절만 해도 가야금이 역사책 밖에서 실연되는 악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서양식 근대화가 유일한 정답이던 시절에 그는 복고의 반역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야금이란 악기의 신비한 소리에 매료되어 그저 좋아서 취미로 시작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수구적 몸짓이 아닌 국악의 재창조를 이루는 모태가 되었다.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정악을, 당대의 가야금 명인들에게 산조를 배우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수업과 음악공부를 병행한다.

그런데 책이 전하는 그의 삶에선 계면조의 슬픈 가락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스승들의 외롭고 처절한 아픔과 영화 '서편제' 에서 보듯 한을 내재화한 운명적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평생 탐구하고 실험하는 자세로 정직하게 살고자 했다" 면서 우리 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그의 모습에선 비상하는 새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1962년 '숲' 을 작곡하면서 창작 국악의 새 집을 지은 이래 강산이 네 번 바뀐 오늘 그는 가야금의 달인으로 국악계는 물론 우리 문화 전반을 통틀어 가장 돋보이는 숲을 이루었다.

그는 94년에 펴낸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풀빛)란 에세이집에서 유려한 글솜씨도 선보인 바 있다. 그 책이 빠른 자진모리의 재미를 갖추고 있다면, 이번 신간 『황병기와의 대화』는 느린 진양조를 띠고 다소 전문적이고 이론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숲' '침향무' '비단길' '남도환상곡'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직접 해설하며, 동서양 음악의 차이라든지 중국.일본과 달리 화음적 요소를 극히 배제한 한국 음악의 독특성,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한이 전통을 해석하는 차이까지 폭넓게 전해주고 있다.

황교수는 진양조야말로 우리 영혼의 금선(琴線)을 울리는 국악의 진정한 맛이라고 한다. "음과 음 사이에 최대한 침묵을 사용하는" 동양악기는 기동성과 속도감이 특징인 서양악기들과 달리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빨리 움직여가기보다는 한 음 한 음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고 그는 설명한다.

그는 "산조는 옛날부터 있던 음악이 아니고 19세기 후반에 생긴 것" 이라며 그런데도 그리도 빨리 잊혀졌다 다시 기억되는 세월의 감회를 피력하기도 한다.

그는 "성긴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오니, 바람이 지난 후에는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는 채근담의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허무함 너머의 마음 비움의 지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의 달인 공자도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된다(成於樂)" 고 했던 것일까.

올해 정년퇴임을 앞둔 황교수이기에 더욱 의미있게 읽히는 이 책. 이젠 독자들이 '얼쑤' 하는 추임새를 새겨 넣을 차례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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