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재벌 규제에서 견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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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재벌로 약칭되는 우리나라 특유구조의 대기업군(群)들은 1960년대 초 이후 전개돼 온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끌어주며 그 과정에서 국가경제와 함께 커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13위 규모의 무역국가로, 조선.철강.반도체.자동차 등 주요 산업부문에서 대부분의 선진국을 앞서가는 세계적 경쟁국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결과는 재벌이라는 독특한 산업경영구조의 활용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업.기업 글로벌化 시대

반면 재벌은 그 진화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야기해 왔다. 과도한 다각화, 불공정한 힘의 행사, 계열기업들의 동반부실화 등이 그 예다.

또 특정 개인과 그의 친족에게 소유와 지배권이 집중돼 있는 것이 재벌의 가장 큰 특징인 만큼 이로 인해 정경유착, 독단적 경영, 소득과 부의 편중, 대립적 노사관계 등이 부작용으로 지적돼 왔다. 근래에는 방만한 차입경영과 과도한 업종다각화로 막대한 부실채권을 누적시킴으로써 금융기관들을 부실화시키고 외환 금융위기를 초래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재벌은 이처럼 우리에게 중요하고 또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성장을 추진함에 있어 재벌기업들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들을 여러가지로 규제해 왔다.

여신관리제도와 공정거래법상의 여러 규제, 소유분산을 위한 기타 규제들, 업종별 진입제한들이 그 내용이다. 외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재벌을 위기의 진원으로 보고 이에 부응해 이른바 '5+3' 의 원칙 아래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재무구조 개선 등을 위한 여러가지 새로운 시책들을 도입했다.

정부는 이와 병행해 광범위한 규제완화를 추진한 바 있으나 재벌기업들에 대한 규제는 이로부터 제외됐다. 그래서 지금의 재벌들은 실로 10개의 발가락이 이런저런 끈으로 묶여 있는 커다란 문어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의 문제점은 이들 재벌을 구성하는 대기업들이 앞으로도 한국의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산업과 기업의 글로벌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 대기업군들의 전략적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들 대기업군은 급변하는 국내외 경쟁여건에 신속히 적응하며 국내산업의 구조조정을 선도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수년 전 외환 금융위기도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재벌들이 이러한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 원인은 두 가지 요인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있었다. 하나는 재벌의 이른바 경제력집중 문제에 대한 증상대응적인 각종 재량적 규제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원인은 기업지배구조의 부실성에 있었다. 기업 내 감시기능이 미비할 뿐 아니라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에 의한 외부적 감시기능도 미비했다. 이 두가지 요인의 결과로 재벌친족들의 경영권과 재벌기업들의 시장독과점이 과보호됐고 각종 규제와 관치금융으로 정부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면서 정경유착과 도덕적 해이가 초래됐던 것이다.

외환 금융위기의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은 정부가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를 최대한 완화해주되 그 대신 국내시장의 대내외 개방, 경영권 경쟁의 자유화, 경영투명성 제고, 금융기관과 지본시장 및 기업 내부의 경영감시기능 강화 등의 방법으로 재벌경영을 강력히 견제함으로써 시장경쟁규율 아래의 자율적 진화를 허용하고 촉진해주어야 한다. 규제를 완화하고 견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民官작업팀 구성 큰 기대

이런 관점에서 지금의 재벌정책은 그간 이뤄진 재벌개혁을 배경으로 새로운 차원의 미래지향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재벌규제를 완화해달라는 재계의 요구로 야기된 최근의 대기업정책 논쟁은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마무리짓기 위한 민관작업팀이 구성된다니 큰 다행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21세기의 대기업정책을 진지하게 근본적으로 토론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논쟁을 우익과 좌익, 또는 여당과 야당간의 대립으로 몰아가거나 이른바 레임덕현상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아울러 정부와 여당은 이 논쟁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지체시킬 경우 재벌정책은 내년 대통령선거시의 첨예하고 분열적인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양수길 세계경제연 자문위원 ·전 주OECD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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