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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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69. 은행 인사 자율화

보건사회부가 따로 있었지만 당시 경제기획원은 사회분야도 관장하고 있었다.

부총리 시절 한 번은 세계 각국의 가족계획협회 대표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대표단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내가 저녁을 내게 됐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호스트로서 디너 스피치를 했다.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얘기가 있다. 자녀수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자녀가 하나인 사람은 문명인이고, 둘이면 보통 사람, 셋이면 야만인이 다. 넷인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넷이다. 내가 팔남매의 맏이이니 그래도 많이 줄었다. 한국의 사회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란 나를 따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미국 간호사협회의 모토는 '부드럽게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tender loving care)' 이다. 이 얘기를 들려 준 사람은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첫 스탠바이 협정에 따라 우리나라에 파견됐던 IMF 주재관 아렌스도르프였다.

그는 첫 강평때 IMF의 정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얘기를 먼저 꺼냈다. IMF 역시 이런 자세로 회원국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들은 얘기는 그 후 공무원으로서의 나의 자세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공무원이 민간인을 상대할 때도 '부드럽게 애정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시절 내가 관료적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런 생각과도 무관치 않다.

6공과 관련해 내가 맡았던 유일한 자리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취임준비위 부위원장이었다.

6공에 대한 아쉬움 가운데 하나는 5공 때 임명 받은 박성상(朴聖相) 한국은행 총재를 임기도 마치기 전 갈아치운 것이다.

한은 총재가 임기를 채우는 관례를 그 때 만들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앙은행의 모델격인 잉글랜드은행에 대해서조차 독립성 시비는 끊이질 않고 있다.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독립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총재의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 총재의 임기조차 존중하지 않는 풍토에서 한은의 독립을 말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에 정부와 유관기관 인사들이 옮겨앉는 '낙하산 인사' 가 여전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금융기관 정상화의 첫 걸음은 은행 인사의 자율화에서 시작돼야 한다.

재무장관 시절 나는 은행 임원 인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후임자 중엔 '황제' 로 통했던 어떤 사람의 인사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은행 인사에 관여한 사람도 있었다. "외부에서 개입할 바엔 재무장관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으냐" 는 것이었다.

1987년 2월 중앙일보의 장성효(張星孝) 기자는 '은행인사 자율화됐나' 라는 제목의 칼럼에 이렇게 썼다.

"재무부 장관의 소신(?)에도 불구하고 제3의 누군가가 힘을 쓴다면 차라리 재무부가 책임지고 간여하는 것만도 못하게 된다. 일단 자율화를 밀고 나가기로 했다면, 소극적인 방관이 아니라 제3의 손길이 뻗치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주는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는 재무부는 책임회피만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실력자의 인사 횡포를 차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재무장관의 관여가 나름대로 정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인사 개입은 당대에 그치지만 재무장관의 인사 관여는 준제도화할 우려가 있다. 실제로 특정인의 은행 인사 개입은 그 후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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