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오선홍 '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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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단숨에 저쪽 둑까지 달려가 버릴까,

그냥 해질녘까지 둥둥 떠서

멱이나 감을까

오리는 노랑 코를 몇 번 물 속에 찔러보고

강바닥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냥 이곳을 박차고 올라

먹물의 바깥 세상까지 날아가 버릴까,

뒤뚱뒤뚱

오리는 제방으로 걸어나와

해지자 막대기 들고 나온 주인을

집으로 인도한다

- 오선홍(1964~ )의 '오리'

한 편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를 읽는 기분이 든다. 가고 싶은 곳을 단숨에 달려가지 못하는 오리, 강물을 박차고 세상 바깥으로 훌쩍 날아갈 수 없는 오리.

그저 비상의 꿈만 꾸는 오리. 땅과 하늘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오리는 슬프다. 오리의 슬픔은 일상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당신과 나의 슬픔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마지막 연의 역전의 묘미는 오리의 슬픔까지 한꺼번에 데리고 가버린다. 오리가 주인을 데리고 간다는 기막힌 발상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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