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선거민심을 바로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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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집권 민주당은 7명의 기초자치단체장을 새로 뽑은 4.26 재.보선에서 참패했다. 서울과 호남 등 네 곳에서 후보를 냈으나 한 명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선거패배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라는 야당의 지적에는 강하게 반발했다.

*** 유신말기 상황과 흡사

바로 그 나흘 후 국회 본회의에서는 일찍이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국무총리와 행정자치부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 여권 3당 소속 의원 중 선별된 일부만 투표에 참여하고 대부분이 기권했다. 혹시라도 여권 내에서 가(可)표가 나와 해임건의안이 가결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덜 미더운 다수를 기권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1978~79년 유신 말기의 정치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유신체제 1기 6년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지닌 선거였다.

여당은 지역구 의석수에선 야당보다 7석을 더 얻었으나 전국 득표율에선 1.1% 뒤졌다. 당시는 대통령선거도 직선이 아니었고 지방선거도 없었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가 표출될 수 있는 선거는 총선거뿐이었다. 그러나 총선 투표율에서 여당이 야당에 뒤졌다는 사실의 의미를 당시 집권자는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선거 직후 "유정회의 3분의1 의석이 있으니 안정세력 확보에는 문제가 없고, 그만하면 표도 예상대로 나왔다. 공화당에선 걱정인 모양인데 그 정도면 잘 됐다고 본다" 는 공식 의사표명을 했다.

국민의 심판을 무시한 그런 상황인식의 표명은 개혁.쇄신을 통한 효과적인 후속조치를 저해했을 뿐 아니라 정국 장악을 위해 강경.무리수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임명직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삼으려던 이른바 '백두진 파동' , 야당에 입당키로 약속한 무소속 의원을 협박해 여당에 강제 입당시킨 무소속 영입파동, 농성 중인 YH여공 강제 해산을 위한 야당 당사 난입, 야당총재 직무정지가처분에 이은 의원직 제명파동 등의 무리수가 이어졌다. 총선 득표율 1.1% 패배에 대한 무반성은 무리한 정국 운영을 가져왔고, 결국 유신체제의 몰락을 초래했다.

지금의 정치도 이런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지난해 4.13총선거 이후나 이번 4.26 재.보선 이후의 집권측 대응에서 그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여소야대로 나타난 4.13 총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년의 정치는 정치도 아니었다는 반성에서 시작해 여야 상생협력정치, 대화정치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한낱 다짐으로 끝나 버렸다. 그후 집권측은 여야 간의 상생협력보다는 DJP+α란 형태로 소수당들을 끌어모아 거야(巨野)를 포위하는 데만 골몰했다.

지난해 말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통령이 나서 총체적 민심수습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나온 것은 '강한 정부, 강한 여당론' 이었다.

그 이후 언론사 세무.공정거래조사, 공정위 언론고시 강행, 경찰의 대우차 노동자 무차별 진압 등이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4.26 재.보선에서 참패하고도 자성은커녕 국회의 해임건의안 처리에서 '선별변칙 투표' 까지 자행했다.

*** 대화 ·화합의 정치로 가야

선거 민심을 무시하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 것처럼 선거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잘 대처하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는 것도 역시 역사의 가르침이다.

특히 우리 국민들은 승자의 오만에 대한 견제 심리가 강해 패자가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여도 금세 승자의 오만을 다스린다.

지난 10년 간만 봐도 1990년 3당통합으로 국회의석이 개헌선인 3분의2를 넘겼던 당시 여당은 92년 14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도 못 건졌으나 그해 12월 대선에선 크게 이겼다. 그러나 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가 96년 15대 총선에선 선전했지만 97년 대선에서 패배해 야당이었던 국민회의에 정권을 내주었다.

98년 지방선거에서 새 여권은 그런대로 체면을 지켰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패배했고, 이번 지방 재.보선에선 참패했다.

이제 선택은 분명하다. 선거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대화와 화합의 정치를 위해 노력하느냐,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계속 오기.무리수로 나가느냐다. 여.야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특히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선거 민심을 바로 보고나 있는가.

성병욱 <본사고문 ·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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